강박에 대한 우리의 대처

수첩을 정리하면
그녀는 오늘도 부지런히 수첩을 꺼냅니다. 정확히 하루 열두 번, 오늘의 일정을 체크하고, 만난 사람과 식사 내용, 운동계획, 한 주간 해야 할 일 등을 틈틈이 적고 확인하고 정리합니다. 수첩 확인이 끝나고 나면 긴장했던 표정은 비로소 편안해지고, 불안에 떠돌던 마음은 닻을 내리는 기분이 들지요.
사실 그녀는 몇 년 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에 자주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첩에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첩을 정리하고, 확인하고, 새로 적곤 합니다. 서점에 가면 메모 습관이 현대인에게 얼마나 좋은지 말하는 책들도 가득하니, ‘역시 메모 습관은 들이기 잘했어’라는 생각이었지요.

문제가 생겼다
그런 그녀에게 언제부터인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불안을 다잡고자 시작한 일인데, 수첩에 새로 적을 내용이 생겼을 때 곧바로 적지 못하거나, 수시로 수첩을 확인하지 못하면 다시 불안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두 어 시간 지나고 나면 ‘수첩 한 번 봐야 하는데…, 오늘 먹은 식사도 잊기 전에 정리해야 하는데…’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불안해지고, 한 손은 계속 가방 속 수첩에 가닿아 있었습니다.
‘강박(强迫)’이란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자꾸 사로잡히거나, 무언가로부터 강한 압박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한자를 그대로 풀어보자면, ‘강하게 다가오는’, 혹은 ‘세차게 다그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세차게 나를 흔들어 놓는지. 그래서 ‘강박장애’란 떨치고 싶어도 피할 길 없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생각들을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는 경우입니다.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수백 번씩 손을 씻고, 선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다 아예 외출 자체를 피하게 되는 것 등이 강박장애의 사례입니다.

왜곡된 부분 스스로 반박하기
인지심리학자들은 나를 향해 파고드는 생각을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생각에 더 몰두하게 되어 강박증이 생긴다고 봅니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하얀 곰’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하얀 곰 생각만 뭉게뭉게 피어나는 ‘정신적 아이러니 효과’(mental irony effect)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강박적 생각에 대해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때 강박 사고에서 헤어 나오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어 공격적인 생각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내가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다니, 내가 그런 악한 생각을 떠올려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만든 건 아닐까?’ 라며 과도한 책임과 죄책감을 스스로 떠안는 방식입니다. 때문에 인지치료에서는 원하지 않는 생각들에 대해 잘못 해석하고 과도하게 책임감을 느끼거나, 이를 상쇄하기 위해 손 씻기, 정리하기, 숫자세기 등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의 현실적 영향을 판단하고, 왜곡된 부분을 스스로 반박해 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여기에 더해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보다 자신을 평가할 때 보다 엄격한 기준을 사용하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도와 과도한 죄의식과 책임감을 줄이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조금 더 너그러워지길
누구나 살아가면서 불행한 일을 겪기도 하고, 그로 인해 생긴 떨치기 힘든 상처와 갈등의 터널을 지나며, 이를 다루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만듭니다. 그런데 강박의 경우 나를 압박하는 생각들과 싸우기 위해, 혹은 그 생각들을 지워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행동이 또 다른 강박이 되어 악순환을 겪기에, 힘겨운 노력이 더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충분히 인정받은 존재는 굳이 자신을 알리려 튀어 오르지 않지요. 하지만 애써 억누르고 외면하면 어떻게든 다른 틈으로 튀어나오는 법입니다. 우리 안에 불편하고 불쾌한 생각을 없애려 싸우기 위해 애쓰기보다,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것이라고 가만히 바라볼 수 있기를. 그렇게 나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기를. 나라는 아름다운 사람과 보다 편안한 사이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위서현
전 KBS아나운서.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 객원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만남의 힘>, <뜨거운 위로 한그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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