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노트>

앙드레 지드 지음, 임희근 옮김, PHONO, 2015년

가끔 그림책과 관련한 특강을 할 때면 글자를 읽는 것처럼 때로는 그림도 읽는다는 이야기를 청중들에게 전한다. 글을 읽는데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이 있고, 그림을 바라보는데 이런저런 이야기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관계가 음악을 들을 때도 그림과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하고 무용수의 손끝과 발끝을 움직여서 만들어내는 섬세한 동작이 하나의 언어로 와 닿기도 한다.
<쇼팽 노트>의 헌정사에 등장하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은 연주는 안 하고 악보를 읽기만 하는 인물이다. 소리 없이 음악을 읽고 상상 속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 오롯한 기쁨이다. 그런데 그가 보거나 읽거나 혹은 듣는 악보는 오로지 쇼팽의 것이다. 왜냐하면 쇼팽의 음악이 ‘가장 순수한 음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쇼팽만큼 투명한 수채화처럼 그려지는 듯한 음악도 없다고.
쇼팽은 그야말로 ‘피아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아이콘 아닌가. 어쩌면 이름마저도 이토록 ‘피아노스러운’ 것일까?

<쇼팽 노트>는 수도원장이 그랬던 것처럼 악보를 통해서 쇼팽의 음악을 몇 마디씩 보거나 읽거나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리고 왜 쇼팽의 음악이 가장 순수한지 그 근거를 일기와 편지 그리고 단문 등 다양한 자료 등을 ‘노트’라는 정의에 어울리게 자유로운 형식으로 제시한다. 여기에 20세기 초반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던 앙드레 지드의 직관과 영감을 가미하여 재미를 더한다. 그렇다면 앙드레 지드에게 쇼팽의 음악이란? 그 대답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좀 다르다.

화려한 콘서트의 피아니스트를 떠올리면 능란하고 기교적인 현란한 곡들을 작곡한 사람이 쇼팽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쇼팽은 웅변적으로 전개되는 음악을 일절 배제했다. 실제로 연주를 직접 들어본 사람들은 쇼팽이 ‘표 값이 아깝다’라고 느껴질 만큼 청중을 실망시킨 적이 아주 많다고 회고한다. “쇼팽은 제안하고, 가정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유혹하고, 설득한다. 그가 딱 잘라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 쇼팽이 가장 쇼팽 티를 덜 내려고 한 경우에만 유일하게 쇼팽다운 것이다. 화려한 꾸밈의 발전이라는 것이 전혀 없고, 악상을 부풀리고 싶다거나 좀 더 많은 악상을 얻고 싶다는 욕심도 없지만, 반대로 완벽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표현을 극도로 단순화하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다.”

<쇼팽 노트>를 읽다가 평생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피아노 앞에 앉아보았다. 앙드레 지드가 “완벽한 예술은 우선 그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예술만이 무한하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 생애 최초의 작곡으로 나의 이름 세 글자에 음정과 박자를 입혀 보기로 했다. 온음으로 연결되는 게 좋을까, 반음으로 연결되는 게 좋을까. 성과 이름 사이를 한 박자씩으로 나눌까, 둘로 나누어 이름은 조금 더 빠르게 진행할까, 화음을 이루는 게 좋을까, 불협화음을 이루는 게 좋을까…. 아주 간단한 형식인데도 온갖 고민이 오고 간다. “G샤프 화음은 샤프(#)의 길을 통해 거기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플랫(b)의 길을 통해 거기에 이르렀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며, 민감한 귀로 들으면 A플랫 음과 같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같은 음으로 이뤄진 화음인데도 말이다(악보상으로는 G샤프와 A플랫은 같은 음이다)”라고 쓰며 “저건 나의 민감한 부분이야” 라고 너스레를 떨었던 앙드레 지드의 1912년 1월 14일 일기 글이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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