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서공회가 펴낸 <대한성서공회사>에는 성경이 이 땅에 전해진 경위, 즉 번역과 전파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을 따라 가보면 그 일을 위해 애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기록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찾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서울 근교에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야소교’(야소는 예수를 한자로 음역한 것)라는 종교에 대한 책 한 권을 보았다. 야소교와 야소교인을 무부무군(無父無君, 어버이도 임금도 안중에 없이 행동이 막됨)의 종교라 하여 반대하는 한문 서적이었다.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흥미에 빠진 그는 역설적이게도 그 책을 보고 야소교에 관심을 갖는다.
“한양에 가서 서양인들을 만나면 야소교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
새로운 앎에 대한 열린 마음과 열정이 그를 한양으로 이끌어갔다. 그가 바로 서울 최초의 세례자이자 선교사들의 어학 선생이었던 노춘경이다. 알렌 선교사의 일기에 그가 최초로 소개된다.

“지금 어학선생은 난리가 일어난 날(1884년 갑신정변을 말함) 그날 오후에 내 집에 와서 중국어 성경을 빌려간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만약 이 책을 읽다가 들키면 목이 달아날 테니 조심해야 된다고 통변을 통해서 말하였으나, 그는 자기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머리를 내저으며 책을 가지고 갔다.”
- 1885.1.29 알렌의 일기 중


이후 기독교에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된 노춘경은 조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언더우드에게 소개되었고, 기독교를 환히 터득할 수 있는 책이나 물건들을 얻고 싶어 했지만 구하지 못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듬해에 다시 언더우드를 찾아가서 그에게 기독교를 배우기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노춘경에게 한문성경과 주석서, 기독교 교리가 요약된 소책자들을 빌려주었고, 노춘경은 그것들을 탐독한다. 또한 선교사들을 따라다니며 외국인 예배에도 참석하였고, 이러한 과정 중에 그는 ‘신앙 결단’을 하게 된다.

이윽고 1886년 7월 18일(혹은 11일)에 역사적인 일이 일어난다. 노춘경이 언더우드 집례, 아펜젤러 도움으로 서울에서의 첫 수세자(受洗者, 세례를 받은 사람)가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수고한 첫 열매”로 불려진다.
세례를 받은 후 노춘경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기독교를 금하는 국법과 조상제사 문제로 생명의 위협을 겪게 될 가능성이 있어 선교사들이 그를 중국으로 피신시키자는 안을 내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노춘경의 회심과 세례의 과정을 본 선교사들은 ‘성경보급’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성경을 빌려갔던 노춘경은 이후 이루어질 한글 성서 개정판들의 마중물이 된 것이다.
이제 서북청년들과 선교사들의 합작품인 ‘로스역’, 일본에서 빚어진 ‘이수정역’ 한글 성서가 검증되고 개정되어 이 땅에 보급되는 역사가 펼쳐진다.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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