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집-숫자를 이해한다는 것

숫자, 그것은 지식이며 권력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수의 신비>는 숫자에 대한 지식을 독점한 권력자의 탐욕을 그려낸다. 학교에서는 숫자 9까지만 가르치기 때문에 국민들은 ‘10’ 이상의 숫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10 이상의 숫자를 알고 있던 소수의 권력자 대사제들은 ‘10의 수호자들’이란 조직을 만들어 10보다 큰 수를 말하거나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 죄를 ‘10 이상의 숫자’를 탐구하던 파르밀 사람들에게 전가한다.
‘수(數)’를 많이 아는 것이 곧 권력인 사회에서 젊은 수도사 뱅상은 살인을 저지른 이단자들을 체포하라는 대사제의 명령을 받지만 ‘수의 비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돌아가지 않고 더 큰 숫자 세계를 배우고 그것을 가르친다. 결국 수호자 조직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로써 대사제들의 권력은 자신들이 독점한 숫자와 함께 유지된다.
문맹률이 높았던 중세유럽에서 유독 ‘글자해독’과 ‘숫자셈법’이 가능했던 유대인들이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은행업을 독점했던 결과 오늘날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계금융업을 지배하는 것을 볼 때 이 작품이 예사롭게 읽혀지지 않는다.

호모 칼쿨루스(Homo Calculus)
사회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 ‘호모 칼쿨루스(Homo Calculus)’라고 명명한다. 라틴어 ‘호모 칼쿨루스’는 ‘셈하는 인간, 숫자를 세는 인간’으로 번역된다. 작가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 속에서 네 번째 별의 주인이 매일 하는 일, 곧 하늘에 달려있는 수많은 별을 매일 세는 삶을 묘사한 이유가 어쩌면 지나칠 만큼 ‘숫자’에 민감히 반응하는 호모 칼쿨루스의 민낯을 고발하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모른다.

79,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 시인 김태준 <감꽃> -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79’일 것이다. 황금(黃金)의 원자번호가 ‘79’이기 때문에. 어른이 된 이후 우리는 증권지수와 주식시세를 알려주는 전광판의 숫자를 보며 표정이 수시로 바뀌는 시대를 산다.
작가 미하엘 엔테의 소설 <모모>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능력이 있는 소녀 ‘모모’가 회색신사들과 그들을 조종하는 호라 박사와 시간을 두고 일전(一戰)을 벌이는 판타지 소설로 그 속에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숫자에 쫓겨 곁에 있는 장미꽃의 아름다움조차 감상하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지금의 우리가 소설 속 어른들과 참 많이 닮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세상을 살리는 ‘세 개의 숫자들’
그럼에도 삶과 세상을 살리는 고마운 숫자도 있다. 무너져가는 이 세상을 다시 옳고 바르게 신축해줄 벽돌 같은 숫자. 그 숫자들은 ‘73, 153, 104-84-05025’이라는 세 개의 숫자이다. 이 세 숫자에 담긴 감동을 만나보자.

73
사람은 누구 편도 아닌 ‘자기 편’이다. 항아리 속 거미들처럼 말이다. 곤충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항아리 속에 거미를 많이 넣어두고 덮개를 덮지 않아도 한 마리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거미 한 마리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다른 거미들이 아래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죽게 할 때 자신도 죽게 되는 불행에 대해 거미들은 모른다.
인간도 거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이 불행해서 슬픈 것이 아니라 타인이 행복해서 슬픈 것이 인간의 습성이다.
우리 자신의 체온 36.5도와 다른 사람의 체온 36.5도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한 자, 부요한 자가 약한 자,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 그들의 손을 잡아줄 때 순간 그곳의 체온은 ‘36.5’에서 ‘73’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감사와 감격, 그리고 희락과 축제의 현장으로 승격된다.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체온 36.5가 죄인의 체온 36.5를 품어 ‘73’이 만들어진 시간인 것이다.

153
히브리어로 사랑을 ‘아하브()’라고 표기한다. ‘아하브’란 ‘손을 내밀어 필요한 것을 제공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곧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사랑은 ‘생각’이 아닌 ‘행위’였다. 병자를 치유해주는 행위,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행위, 위험에 처한 자를 보호해 주는 행위가 곧 ‘사랑’이었다. 유대 랍비 힐렐(Hillel)이 들려준 “가난한 자를 말로만 위로하고 손발을 움직여 돕지 않는 것은 마귀들이나 하는 사랑이다”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것은 부활 이후 제자들과 만난 갈릴리 바다였다. 메시아로 굳게 믿었던 스승이 죄수의 신분으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긴 제자들. 그러나 밤새 투망(投網)을 해도 여전히 빈 그물이었고, 결국 제자들은 절망의 새벽을 맞게 된다. 추위와 배고픔이 밀려온 그 시각,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과 양식이었다. 그때 해안가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한복음 21장 6절)라고 하셨고, 그대로 하니 ‘153마리의 물고기’가 그물이 잡힌다. 이후 예수님은 물고기 중 일부를 구워 제자들에게 주신다. 이로써 방금 전까지 제자들을 괴롭혔던 추위와 배고픔은 사라진다. 이 ‘153’이란 숫자는 여전히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무게이며, 추위와 배고픔에 있는 제자들의 고통을 한순간에 제거해주시는 능력의 표출이었다. 이후 초기교회는 ‘153’이란 숫자를 실패한 죄인들에게 넉넉히 베푸시는 예수님의 은총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가난과 아픔에 떨고 있는 이 시대의 약자(弱者)에게 ‘153’을 제공해주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스 베르쟈에프는 “자신을 위해 준비한 빵은 물질이지만, 남을 위해 준비한 빵은 정신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식탁 위에 쌓여 있는 ‘빵’은 ‘물질’인가 ‘정신’인가.

104-84-05025
지구촌 곳곳에서는 지금도 전쟁이 만든 난민들의 눈물이 끊이질 않는다. 세계 인구 100명당 1명이 전쟁, 박해, 폭력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는데, 미얀마의 핍박으로 도피한 로힝야 난민(75만)과 베네수엘라(450만), 시리아(560만), 남수단(220만)이 삶의 터를 잃고 타지에서 방황 중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들의 절반이 18세 미만인 아이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의 생존과 보호를 위해 손을 내미는 단체가 있다. 바로 ‘국제난민기구(UNHCR)’이다. 이 단체의 유엔고유번호가 ‘104-84-05025’이다. 유엔 산하에 많은 기구가 있지만 유독 이 단체에 시선이 가는 까닭은 설립 목적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던”(마태복음 4장 23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복의 총량’에는 이웃에게 줄 몫도 포함되어있다. 곧 ‘주라고 주신 것’이다. 난민을 돕기 위해 모두가 의사나 선교사가 될 수는 없지만 필요한 식량과 약품을 제공해주는 후원자는 될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섬기는 것을 닮는다. 곧 자기가 신(神)으로 모시고 추앙하는 그것을 닮아간다.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숫자는 곧 ‘자신을 만드는 힘’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어떤 숫자는 삶을 품위 있게 해주고, 어떤 숫자는 삶을 조악하게 만든다. 숫자에도 ‘품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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