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서공회가 펴낸 <대한성서공회사>에는 성경이 이 땅에 전해진 경위, 즉 번역과 전파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을 따라 가보면 그 일을 위해 애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민대홍 기자가 이 기록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찾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성경을 받았던 자의 아들
조선 후기, 청나라와 밀무역을 행하던 책문(柵門)인 고려문(高麗門)에서 역사적인 접선이 일어난다. 바로 고려문을 통해 만주지방을 드나들던 평안도 의주 출신 50대 남성 상인과 서양인 선교사의 만남이다. 1874년 로스 선교사가 고려문에 나와 있을 때, 상인은 로스가 묵고 있던 여관을 찾아갔다. 그렇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주어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선교사는 상인을 통해 조선의 쇄국 상황을 들을 수 있었고, 상인은 선교사에게 한문 <신약전서>와 기독교 서적 <정도계명(正道戒命)>을 얻었다.
상인은 의주로 돌아가 그 책을 자신도 보고,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도 읽게 하였다. 아들은 생전 처음 보는 내용의 글에 호기심을 느꼈고, 만주에 있는 서양 선교사를 찾아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한국인 최초의 세례가 있은 직후에 한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바로 로스에게서 성경을 받았던 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다만 ‘도를 배울’ 목적으로 왔다. 이 사람은 이미 진리를 알고 있었으며, 신약성경이 부친의 집에 있어 자신도 그것들을 읽어 그 결과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본질적인 성격을 의심할 여지없이 이해하고 있었다.” - 매킨타이어, “선교 보고서” 중
그 아들이 바로 두 번째 한국인 세례자 북산 백홍준(1948-1894 또는 1893)이다. 세례를 받은 때가 1879년 7월경이니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가 정식으로 내한하기 5년 전의 일이다. 매킨타이어를 만나고 세례를 받기까지 약 4개월간 백홍준은 여타의 ‘개혁적 조선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번역을 돕는다.

의주의 백사도(Paik the disciple)
백홍준은 고향으로 돌아가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에게 보다 확실한 기독교의 진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글 성경은 아직 없었으니 한문 성경, 그리고 로스와 이응찬이 1878년경 초역한 쪽 복음들을 가지고 공부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백홍준은 만주에서 기독교서적을 나르다가 적발되어 수 개월간 투옥되기도 했지만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882년 이후 만주에서 번역·출판된 로스 역 복음서들이 의주로 유입되었고, 백홍준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본격적으로 꾸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진해서 성경을 권하는 권서인, 성경을 판매하는 매서인,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어 적극적인 ‘증인’의 삶을 살았다. 매킨타이어는 그를 “최초의 전도인이요, 최초로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은 자”로 표현한다.
그렇게 삶을 불태운 백홍준은 기독교를 전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2년여 간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사는 날 동안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과 자신이 믿는 바를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이끌었던 의주 신앙공동체에서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을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래서 이러한 백홍준에게 로스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백사도’라는 칭호를 붙였다.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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