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정돈하면 놀라운 힘이 돼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아 궁금해하며 염려하던 친구가 있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이 어려운 시기에….
그때 쪽지 하나가 전해져 왔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 오래전에 그 친구와 함께 이 말씀을 읽던 날이 있었다. 그때가 기억나며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이 평안함이 전해져 왔다.

힘이 되는 기억들
좋은 기억이 힘을 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더욱이 성공한 체험은 흐뭇하고 행복해 한두 번 힘을 줄 뿐 아니라 들춰질 때마다 두고두고 미소 짓게 하며 때론 환호하게 한다.
아름다운 기억들은 특별한 말이나 노래와 연상되기도 하며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마다 ‘기쁜 에너지’가 되어 생기를 느끼게 한다. 속에서 올라오는 그 벅참은 굳이 남과 공유하지 않아도 혼자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거기에 함께 이야기하며 들어줄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 되어 더 세심한 기억으로 다듬어진다.
그런데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 속에도 미심쩍은 면들이 섞여 있음을 알게 된다.
열심히 노력해서 상을 받고는 옆 사람을 의식해 즉흥적으로 했던 행동들, 일이 잘돼 멋지게 출발하던 날 비행기에서 고막이 찢어질 듯 귀가 아팠던 일, 새로운 것을 알아 뛸 듯이 기뻤던 순간, 놓치게 되었던 그 무엇.
이러한 기억은 우리에게 행복한 힘을 줌과 함께 또 다른 생각할 힘을 준다.

기억이 자기중심이라면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기억이 객관적이지 못하고 자기중심 또는 자기의 성향대로 저장된다고 말한다. 같은 일을 당해도, 같은 자리에 있었어도 각자 자기의 입장에 따라 해석과 기억은 다르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기억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과학자들의 이런 말을 잘 받아들이면 이 소모적 다툼은 줄어들고 자신의 일방적 기억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방향도 열리게 될 거다.

영화 <레인 맨>에는 자폐증으로 젊은 날 내내 격리되어 살아온 레이먼드가 나온다. 아버지의 유산을 놓고 이런 형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동생은 답답한 마음으로 형이 있는 장애인 센터를 찾아간다. 형을 억지로 빼내 며칠을 같이 지내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베이비 찰리’라 불리던 아주 어린 시절 목욕탕 물에 데며 집안이 야단법석을 피웠던 일이 있었던 거다. 또 집안에 화재경보기가 크게 울렸던 날 마음 약한 형 레이먼드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
이러한 충격적인 기억이 자폐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가 세상을 떠나며 형은 곧 장애인 센터로 가게 된 것이다. 동생은 문득 자신의 인생 속 힘들 때마다 노래로 위로해주는 가상의 인물 ‘레인 맨’이 어릴 적 함께 살았던 형 ‘레이먼드’였음을 알게 된다. 착한 위로자 레인 맨, 형 레이먼드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그렇게 연결된 것을.
이렇게 기억이 새로워지며 이기적이었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자명한 수순이다 .

희미하게 얽힌 기억 속에서 의미를 찾으면 과거에 묻힌 보석을 찾는 것이고, 자신의 착각이나 편협함을 발견한다면 현재의 삶에 한 걸음 진보를 주게 된다. 그런 면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대충 미화하려는 태도는 성장을 붙잡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앰뷸런스나 소방차 소리의 공포와 높고 많았던 계단, 무거웠던 문들, 비바람과 땡볕을 기억하지 않는가. 전쟁이나 큰 사태를 겪은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그러나 이런 쓸쓸하고 끔찍한 기억들 역시 우리에게 주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너끈히 지나왔네. 겪어 봤으니 잘할 수 있다’로 이어지며 용기 있게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이다(소설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고마운 일에 머무르기
얼마 전 대학병원 연구팀에서 실험자들에게 고마운 일을 매일 떠올리게 했더니 즐거움을 관장하는 뇌의 보상회로가 여러 부위로 연결되며 뇌를 활성화했다고 보고했다. 고마운 사람이나 감사한 일에 대한 기억을 습관처럼 가지면 뇌 활동에 긴 효과를 주어 수면이나 일, 운동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좋은 일, 감사한 일을 너무 빨리 지나가게 하는 것 같다. 마음에 원하던 일이 일어나도 그 순간 ‘잘됐다. 감사하다’ 하고는 바로 다음 숙제로 마음을 옮긴다. 너무 여러 가지 기대를 안고 살아선지 모르지만 고마운 일에 마음을 머물며 진심으로 하나님께, 또한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매우 유익한 일인데 말이다.

조각 기억을 풍성하게
조각 기억을 스토리로 엮다 보면 종종 자아도취에 빠져 왜곡이나 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빈약한 기억이라도 삶의 문제를 풀어간 것에 초점을 맞춰 이어가다 보면 점점 과장이나 왜곡이 싫어지고 자신의 진실을 찾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수치스러워 감추고 싶었거나 잊으려 했던 기억들이 오히려 반면교사가 되어 가장 귀한 삶의 지침이 된 것도 볼 수 있기에. 그러면서 삶 가운데 비슷한 패턴을 찾아 자기 생활의 스타일을 찾을 수 있다. ‘조용한 아이였구나.’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있었네.’ ‘그러나 벽이 느껴지면 물러서지 않고 담판을 지었고’ ‘늦게 성장하면서 이론과 삶을 맞춰 가려 했구먼.’

이렇게 기억을 통해 힘을 얻고 자기 스타일을 찾아가는 것이다(이야기치료 전문가 앨리스 모건).
우리의 힘이 되는 기억을 돕는 것으로는 카드나 편지, 사진만 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서 의미 있는 것들을 가려 두고 가끔 들추며 좋은 에너지를 얻길 권한다.

은혜 받은 기억은 어떻게?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은혜 받은 기억은 중요한 삶의 주제다. 신앙생활을 해오는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은혜의 기억들이 종종 있는데 그때를 그리워하며 심지어 퇴행 왜곡하는 경우는 왜 일어날까. 그것은 은혜를 받은 사실에 감격했을 뿐 그 기억을 정돈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꼭 필요한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상황은 잠깐 지나가고, 자기 마음대로 적용하거나 바로 다른 염려에 빠져들어 성숙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받은 은혜를 기록하며 정리하는 것이 좋다.
노트에 써보고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자신이 중시하는 삶의 방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수고의 과정 후 이뤄진 결실인지, 조건 없이 받는 선물들인지, 나만 특별한 것을 받기를 원함인지, 또는 다른 이들과 나눌 때 얻는 기쁨인지 구분해볼 수 있다.
이렇게 기억을 정리해나가면 좋은 기억도, 안 좋은 이상한 기억도 모두 내게 힘을 줄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이다.

전영혜 기자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