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준 ‘밥상’

오후 5시, 점심을 먹은 지 한참 지난 때라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오는데 허기가 몰려왔습니다. 도시라면 편의점이나 분식점, 슈퍼라도 있겠으나 사방으로 논과 밭밖에 없는 시골마을이었습니다. 가을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었습니다. 수업을 끝내고 냉큼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저녁을 먹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습니다.
농촌에서 그 시각은 일이 끝나는 때가 아니었기에 집집마다 어른들은 모두 일하러 나가 없고, 방과 후에 아이들만 집을 지켰습니다. 용돈벌이 삼아 아이들 몇 명에게 과외라도 해달라는 부모들의 등쌀에 못 이겨 방문과외를 하였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네발 오토바이를 마련해 씽씽 내달렸지만, 처음엔 이 마을 저 마을을 걸어 다니며 시골과외 선생질을 했습니다.
기운이 넘치는 날이면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꽃도 쳐다보고 흘러가는 구름도 올려다보고 풀벌레 소리에 귀도 기울이련만, 그날은 모든 것이 서글펐습니다. 배가 고프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시간에 간식을 챙겨줄 사람도 없거니와 애초에 학부모들께 신경 쓰지 마시라고 사양해 둔 터였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집, 기진맥진하여 아이를 가르칠 힘도 없지만 책임은 다하여야 하겠기에, 아이와 함께 책을 펼쳤습니다. 그 때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집 가까이에 논밭이 있으면 안주인은 집과 논밭을 오고가며 일하게 마련이라, 필요한 게 있어 잠시 들렀나 싶었습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났습니다.
“나와 보셔유.”
무슨 일인가 하고 마루로 나섰습니다.
“드릴 게 읎네유, 시장 하시지? 이거라도 잡숴요.”
언제 볶았는지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상을 차려두었습니다. 일하러 다시 나가야 했으니 얼마나 다급하게 볶았을까요? 그릇에 옮겨 담을 여유도 없이 낡은 프라이팬 그대로 물 한잔과 함께 차려놓았습니다. 고기나 계란으로 멋과 맛을 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밥과 김치만으로 볶은, 수수한 김치볶음밥이었습니다.
하지만 뭔지 모를 큰 감동에 휩싸인 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습니다. 깊은 맛이 나는 시골 묵은지로 볶았으니 재료로 따지자면 최고의 수준이었고, 양도 푸짐했습니다. 배를 채웠는데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진 듯하여,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이야기입니다. 내게 힘이 되어준 밥상을 떠올릴 때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날의 김치볶음밥을 떠올립니다.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섬김이라 감동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주인은 많은 농사일에 시부모 봉양, 세 자녀까지 건사하느라 마을에서 누구보다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심성 고운 그분의 마음속에 나를 위한 배려심이 잠시 떠올랐어도 그냥 무시하고 밭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더 나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 설령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형편껏 밥을 차려주었습니다. 아니, 형편을 넘어 힘에 지나도록 차려주었다고 해야 맞습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희생하며 섬겨주었으니까요.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나를 미소 짓게 합니다. 종종 두 아들을 위해 김치볶음밥을 볶아줄 때면 새록새록 그 기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도시로 이사 와서 근사한 음식을 참 많이 대접받았습니다. 잡지에서나 볼 법한, 차마 젓가락을 대어 그 모양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예쁜 음식도 종종 마주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음식도 그날의 김치볶음밥을 뛰어넘는 감동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살면서 감동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웅장하고 큰 것도 감동을 주지만 때로는 아주 작고 몹시 허술한 것들이 잊히지 않는 감동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바쁘지만 모든 일 제쳐두고, 나를 위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부터 그분의 사랑과 이해, 배려심이 김치볶음밥 속에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차렸기에 겉모습과는 상관없이 그것을 먹는 내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준 게 틀림없습니다.

추둘란
작가. 녹색연합에서 펴내는 월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연재한 글을 묶어 <그래도 콩깍지>를 펴냈다. 식물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파브르 식물이야기>를 풀어서 썼으며, <작은 교회 큰 밥상-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따뜻한 밥 한끼>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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