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책방 〈용서점〉 박용희 대표

미용실, 과일가게, 김밥집, 철물점.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 한 편에 눈길이 머무는 지점이 있다. 뱅뱅 돌아가는 이발소등 사이에 있는 동네서점. 우리가 ‘책방’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한 때 익숙했으나 지금은 낯선 곳이 된 곳. 그래서 반가운 걸까.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의 한 동네. 10평 남짓한 책방 ‘용서점’엔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책내음 보다 커피향이 날 것 같은 분위기. 여기저기 자유롭게 꽂혀 있는 책들이 정겹다. 책에는 깨알 글씨들이 적힌 색종이들이 붙어 있다. 책의 포인트를 짚어주는 설명. ‘1000원’ 특가판매대엔 구순의 동네 어르신께서 책을 뒤적이고 인천에서 온 여성은 이내 책 한 권을 구입한다.
“저희 <용서점>은 처음이시죠? 괜찮으시면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어요.”
저렴하게 구입한 책 한 권. 이제부터 여성은 도서 정보는 물론, <용서점>이 진행하는 다양한 이벤트와 모임 등에 초대를 받는다. 손님을 이웃처럼, 친구처럼 소통하며 연을 만들어가는 동네서점이 하는 일이다.

‘용한’ 동네서점 〈용서점〉
범상치 않은 마을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용서점> 박용희 사장(어울림교회·사진 우)은 도서마케팅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첫 직장이 장로회신학대학교 구내서점이었다. 그 때부터 꽤 오랫동안 출판사와 잡지사, 선교단에서 책을 판매하는 업을 일궈왔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지금은 동네서점 사장으로 세간의 적잖은 주목을 받고 있다. 출판 인쇄업의 침체로 동네 서점들마저 사라져간 지 오래, 책방을 다시 시작한 것은 분명 의아한 결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껏 3년 8개월 동안 문을 열고 있다. 그것도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며!

책으로 연을 맺은 손님들은 고객을 넘어 이웃사촌이 되었다. 책방은 그들의 재능을 나누고 끼를 발산하는 동네 사랑방이다. 이웃사촌들은 책방에 모여 이러저러한 모임들을 만들어 냈다. 책보는 모임 ‘봐용’은 물론이고 글 쓰는 모임 ‘써용’도 연속 히트를 쳤다. 책-행사-모임으로 이어지는 책방에서의 활동이 <용서점>을 역곡동 주민들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급기야 주간 참석 인원이 100명까지 불어난 <용서점> 식구들. 책방 그 이상의 공간이 되었다. 용하다 못해 분명 놀랄만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박 사장을 대신해 용서점의 문을 열고 닫는 특이한 동네 주민들. 더군다나 지금은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상황 중이 아닌가. 박용희 사장의 뛰어난 사업수완 덕일까? 그가 탁월한 북마케터였기에 가능한 일일까?
“아니요. 그것만 갖고는 마을 책방에서 이런 현상이 이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죽을 뻔한 자전거 여행
4년 전 박용희 사장은 사직서를 쓰고 여행 짐을 쌌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소천 때문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고 인생의 허망함에 휩싸였다. 그래서 떠난 먼 길. 자전거로 6개월간 오지로 향했다. 북한 접경지역, 티베트, 인도를 홀로 달렸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습니다. 후회도 많이 했고요. 티베트나 인도보다 북한 접경지역이 정말 위험하더군요.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그런데 신기하게도 계속 가게 되더군요. 길은 나타났고 돕는 이도 있었어요.”
박 사장은 고행과도 같은 자전거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이 너무 많았다. 난관 앞에서 버티는 끈기도 얻었고, 티베트의 고지대에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해발 3, 4천 미터의 고지대는 하루 종일 사람도, 생명체조차도 보이지 않았어요. ‘내가 지금 화성에 와 있나?’ 싶을 만큼 고독하게 있다 보니 내가 알고 있던 나 이상의 나를 제대로 보게 한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행에서 배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박 사장은 귀국 후 이에 대한 책을 쓰고 강의에 전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길은 여행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뜻밖의 길
“지인이 고양시의 공간을 무상으로 내어주면서 하고픈 걸 뭐든 해보라고 하셨어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집에 책이 많으니 일단 중고서점을 해보자 마음먹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이었다. 책방 주인은커녕, 사업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다행히 책방을 연다고 하니 책을 기부하겠다는 지인들이 있었다. <덕은동 용서점>은 이렇게 모은 책으로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순항이었다.
하지만 이내 위기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 정신적,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며 박 사장은 다시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바로 3년 전 지금의 부천시 역곡동이다.
이번엔 정말 골목 사이에 있는 동네에 책방을 차렸다. 책만큼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박 사장에게 동네 사람들이 오가는 골목책방은 딱이었다. 이윽고 아담한 책방에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왔다. 한 사람 한 사람 알아가면서 그들이 하는 일, 남다른 재능이 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역곡동 용서점>은 문화행사의 장이 되어갔다.

“동네 손님 한 분이 가수였어요. ‘공연 해볼래요?’ 그렇게 콘서트를 가졌지요.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보는 편입니다. 와인 모임도, 그림 전시회도 그런 식으로 열렸어요. 제가 먼저 기획해서 사람을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용서점>은 첫 1년 동안은 작가와의 만남을 개업행사로 갖는 등 ‘이벤트’를 자주 가졌다. 15명 내외의 작은 모임이었지만 반응은 좋았고 돈독한 관계로 이어졌다. 개업 2년차부터는 역시 손님들의 요청으로 다양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글쓰기 모임 없어요?”
그래서 시작된 ‘써용’은 다섯 개 그룹으로 발전해 회원이 60명까지 늘었다. 자유롭게 각자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자리다. 커리큘럼도 없다. “사람들이 글쓰기에 그렇게 관심이 큰지 몰랐어요. 정말 잘 쓰시더라고요. 출판업자인 제가 봐도 작가들보다 더 잘 쓰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자신이 그걸 몰라요. 글 쓰고 낭송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글 쓰는 시간이 너무 행복한 거죠.”

책에서 소외된 이웃들
용서점에는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책을 읽지 않을 것 같은 손님들이 의외로 많다. 건축노동자인 한 남성은 지방에서 일이 잡히면 미리 와서 책을 한 꾸러미 사간다. 일이 끝난 후 숙소에서 책을 읽기 위해서. 서울 잠실까지 청소 일을 다니시는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1000원 특가 책을 즐겨 사 가신다. 긴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기 위함이다.
“서점을 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에게 독서의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책을 사고 싶어도 살 곳이 없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도시의 대형서점들은 땀 냄새 풀풀 풍기면서 드나들기에는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온라인 구매도 어르신들께는 불가능하죠. 동네 책방을 시작하고 보니 책에서 소외되었던 우리 이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어요.”
박 사장에게 ‘손님’은 고객 그 이상이다. 협력자요 동역자. 자신은 손님들이 좋은 책을 만날 수 있게 하고
<용서점>은 그들의 하고픈 바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장일뿐이다. 책을 인연으로 삶을 나누며 소통하는, 서로에게 길이 되어주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 동네 작은 천국
“마을서점 개업을 문의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세요. 대부분 목사님들이신데, 서점에 사람들이 계속 모이고 단기간에 인원이 늘어나니까 목회에 접목하고 싶은 것 같아요. 하지만 책방은 그냥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두시는 게 바람직합니다. 다른 의도가 없는 동네 책방.”
박 사장은 <용서점> 같은 책방이 여러 마을에 생기길 바란다고 했다. 지역을 거점으로 한 사업은 가장 중요한 것이 지역의 평판, 무엇보다 주민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책방은 점차 지역 명물, 로컬 크리에이터(Local Creator)가 될 수 있다. 책방 이웃, 주민들이 함께 힘을 보탤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사실 경제적으로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자전거 여행이 이와 비슷해요. 길이 있으니까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지금 이 길을 그저 오늘도 갈 뿐입니다.”
6개월의 오지 여행이 책방 운영에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다는 박용희 사장. 그는 인터뷰 중에 ‘동네 천국’이란 말을 종종 했다. <용서점>을 하면서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바람과 소망은 있다. 어느 새 막역한 친구가 된 역곡동 주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특별한 공간. 용서점이 역곡동의 작은 천국이 되는 길을 그저 열심히 가겠다는 다짐이다.

김희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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