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죄를 지을 때마다
즉시 확실한 벌이 내려졌더라면 영혼이 정화되었을 텐데,
따라서 가장 공정한 신에게 바치는 기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가 아닌 ‘우리 죄를 벌하시고’가 되어야 했다”


이 시대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권력이 된 시대이다. 따라서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에게 놀라울 정도로 호의적이다. ‘진정 아름다움은 선과 권력인가?’에 대해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891)에서 아름다움에 ‘집착’할 때 벌어질 파장과 비극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소설은 화가 바질 홀워드의 화실에서 시작된다. 2개월 전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도리언 그레이의 미모에 감탄한 바질은 도리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그리고 초상화의 완성을 앞둔 시점, 벗인 헨리 워튼이 찾아오는데 그가 초상화를 보고 ‘지상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찬미하며 모델에 대해 묻자, 헨리가 특유의 독설과 냉소로 주위 사람들을 쾌락에 탐닉하도록 만드는 위험인물임을 알기 때문에 바질은 경계한다.

이후 헨리는 그림 속 도리언이 귀족의 손자이며, 최고의 미인으로 추앙받던 마거릿 드브뢰가 사랑에 빠져 가출한 후 낳은 아들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부(巨富)였던 외할아버지와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막대한 유산을 홀로 받은 것도 알게 된다. 그는 도리언이 자신처럼 노동 없이도 생존이 가능한 유한계급에 속한 청년임을 알게 되며 호감을 느낀다.
바질은 ‘위험한 헨리’와 ‘순수한 도리언’을 분리시키고 싶었으나, 하필 헨리가 방문한 날 도리언이 화실을 찾아옴으로 둘 사이에 없었으면 좋았을 만남이 이루어진다. 바질은 “도리언을 망쳐 놓지 말게”라고 충고하지만, 헨리는 도리언에게 ‘이제 시간이 흐르면 당신의 아름다운 청춘은 사라지고, 곧 주름이 깊어진 늙고 추한 흉물이 찾아오니, 지금 청춘일 때 도덕과 종교에 묶이지 말고 마음껏 삶을 즐겨라. 세상에는 오직 청춘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도리언은 “내가 늙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난 자살해 버릴 거”라며 흐느낀다. 그리고 아름답게 완성된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이 초상화가 내 대신 늙어간다면 내 영혼이라도 내어 줄 거”라고 절규한다. 바질이 염려했던 일이 결국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아름다움’이 ‘자신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알아간 도리언은 바질과 멀어지고 헨리와 가까워지며 급속히 타락한다.
그러던 중 도리언은 삼류극장에서 연기하는 여배우 시빌 베인을 사랑하게 된다. 소식을 들은 헨리와 바질은 직접 확인하기 위해 도리언과 함께 그녀의 공연을 관람한다. 그런데 이미 결혼을 앞둔, 따라서 미래가 보장된 시빌 베인은 전처럼 치열하게 연기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그것은 곧 ‘실망스런 공연’이 되고 만다.
바질과 헨리에게 모욕을 당한 도리언은 시빌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시빌은 그 충격으로 음독자살을 하게 된다. 시빌의 죽음에 괴로웠던 도리언은 집에 돌아와 우연히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경악한다. 그 초상화에는 순수하고 맑은 청년이 아닌, 탐욕과 욕망으로 추해져 버린 ‘흉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리언이 처음 소망했던 ‘나 대신 그림이 늙었으면’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추악해질수록 그림이 추악해져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리언, 그림을 다락에 넣어둔다.

그런데 화가 바질이 도리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찾아와 도리언에게 그 초상화를 보여 달라고 한다. 초상화 속의 도리언을 보고 충격을 받은 바질. 도리언은 초상화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를 살해하고 친구 캠벨을 협박해 바질의 시신을 몰래 처리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던 친구마저 자살한다. 또한 죽은 여배우의 동생 제임스 베인이 복수를 위해 도리언의 별장파티에 잠입하던 중 산토끼로 오인되어 총에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도리언은 자신 때문에 죽은 시빌 베인과 바질, 그리고 캠벨과 제임스를 생각하며 실의에 빠진다.

그리고는 급히 집에 돌아가 애써 멀리했던 자신의 초상화를 다시 꺼냈을 때 그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흉물이 미소짓고 있었다. 분노한 도리언이 칼로 ‘초상화 속의 노인’을 찌를 때 다락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하인들이 본 것은 추한 모습으로 피 흘린 채 바닥에 쓰러진 노인의 모습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초상화 속의 청년이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 속의 헨리의 발언을 통해 당시 ‘말’로는 경건과 도덕을 외치면서도 ‘행위’로는 ‘속물(俗物)’을 살던 19세기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귀족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을 닮는다. 따라서 ‘그대의 삶’을 닮은 ‘그대의 초상화’는 지금도 여전히 그려지고 있다. 문득 나의 초상화를 보기가 두려워진다. 이미 ‘아름다움’이 ‘우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가 필독했으면 하고 소망한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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