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친구'를 생각하다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그 대상은 정치적, 종교적 이념과 신체적 한계, 정서적 또는 경제적 삶의 조건들로 인해 제약된 존재들에게까지 고루 미치고 확대되어야 한다.”(이승갑, <관계와 책임>)

율법이 규정한 ‘이웃 사랑’의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한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을 되새긴다. 그러면서 최근 유튜브(Youtube) 알고리즘에 이끌려 이미선 약사(사진)를 다시 본다. 본지와 그녀의 인연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터뷰를 통해 만나, 칼럼 ‘이미선 약사의 미아리 사람들’을 직접 연재하기도 했다.
약사, 사회복지사, 상담사, 그리고 이모. 여러 모습으로 살지만 이미선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되는 그녀는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88번지 구역에서 25년째 ‘건강한 약국’을 운영한다. ‘미아리 텍사스’라 불리는 성매매 집장촌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성매매 여성들과 동네 술주정뱅이 아저씨, 폐지 줍는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구분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그녀의 따뜻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진 터. 이후의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이미선 약사를 만나 던진 첫 질문은 이러했다.
“이곳의 이웃들이 약사님의 친구인가요?”
그녀는 한참 고민을 했다. 사실 친구다 아니다 정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고민 역시 한마디로 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윽고 말을 꺼낸다.
“누구나 삶에 굴곡과 아픔이 있지만 사실 저도 만만찮은 삶을 살았어요. 이 동네로 이사 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죠. 특히 2010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9년을 병상에 계셨죠.”

긴 인생의 여정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삶’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 부모님 별세와 긴 투병, 약사로서뿐만 아니라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해온 삶의 무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나눔’은 멈출 줄 몰랐다.
“저는 뭔가가 생기면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요즘에는 새로운 별명도 생겼죠. 바로 ‘온라인 앵벌이’에요”
동대문에서 신발장사 하는 후배가 기증한 신발 나누기, 제약회사에서 후원 온 여성에게 좋은 유산균 나누기 등 그녀는 하월곡동 88지 일대의 ‘나눔 꾼’이다. 나누기 위해서는 모아야 할 터. 그래서 그녀는 좋은 의미의 ‘앵벌이’다. 그러나 나누면서 그녀가 경험하는 것은 ‘받고 있음’이었다.
“이모 먹어”, “이모 드셔”, “이모 잡숴.”
쭈뼛거리며 약사 이모에게 다가오며 이곳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때로는 통닭이 든 봉투를 건넨단다.
“이 지역에서 그녀들에게 통닭 받는 사람은 저 밖에 없을 걸요?”
통닭뿐만 아니라 커피도 다른 간식도 사 온다. 이런 주고받음이 그녀들의 ‘관계’다.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 중에 몸이 건강하거나 타인에게 무언가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너무 지쳐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소한 까칠함’이 많아요.”
업주나 같이 일하는 사람, 진상 손님들과 싸운 뒤 그녀들은 약사 이모를 찾는다. 듣다 보면 자기 신세한탄으로 귀결되는데 그때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일지. 약사 이모는 그저 들어준다고. 듣고 나서 “잘 견뎠어, 잘 참았어”라며 ‘편’이 되어줄 뿐이다.

“나와 그들의 삶의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난 그저 ‘조언하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이 돼요. 그런데 25년간 이곳에 있으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고, 그저 함께 수다 떨어주고 욕해주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들과 나의 입장을 반대로 놓아도 마찬가지예요”

인터뷰 막바지가 되어서야 약사 이모는 첫 질문에 대해 답했다.
“생각해보니까 친구 맞더라고요. 인간관계는 상호관계인데, 보통은 내 생각을 먼저 하죠. 나는 저 친구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었나. 약사? 동네 이모? 그런 건 아니었어요. 바로 친구였고. 그러면 그들도 나에게 친구가 되는 거예요.”

이웃사랑을 확장하는 삶의 여정은 타자를 친구로 삼게 한다. 나아가 약사 이모는 타자를 친구로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에 대한 긍정’의 필요를 말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중심에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보았어요. 친구를 만난다던가, 쇼핑, 영화 보기, 놀러 가기 등 2~30대 평범한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인 거죠. 인간관계도 매우 협소하고요. 그래서 이 친구들에게 ‘당신도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짧으면 3년, 길면 5년 후 하월곡동 88번지 일대는 재개발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 이곳에서 함께 살던 친구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존재의 가치를 상호관계 속에서 발견한 친구들은 다른 곳에서 또 다른 타자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을 친구로 맞이할 거다.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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