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것일까?”


한 개인에게 있어 예술세계와 세속세계는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 관계일까? 예술가에게 성직자 수준의 도덕적 삶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 이런 두 가지 질문에 대한 깊은 고민을 날카로운 필치로 담아낸 소설이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1919)이다.
흔히 <달과 6펜스>가 화가 폴 고갱의 삶을 적당한 수준으로 윤색한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은 화가 폴 고갱을 대입(代入)하지 않더라도, 독자에게 ‘지금 자신이 선택한 삶이 진정 자신이 바라던 삶인가?’를 질문하게 하는 문제작이다. <달과 6펜스>의 ‘달’과 ‘6펜스’는 둘 다 은빛으로 빛나고 형태도 원형(圓形)이다. 그러나 이 둘이 걸어가는 방향은 크게 다르다. ‘달’이 ‘영혼과 예술을 추구하는 감성’을 상징한다면, 영국에서 가장 낮은 단위의 은화인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속적 가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달과 6펜스>는 ‘달빛 세계’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어느 마흔 살 남자의 서사(敍事)이다.

사회중산층인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저 선량하고 따분하고 정직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아내와 두 아이를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이유는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이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헤엄을 잘하든 못하든 살기 위해 수영을 해야 하듯, 나도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그렇게 선택한 파리의 삶은 그에게 지옥으로 다가왔고, 결국 가난과 절망에 지쳐 질병으로 쓰러진 스트릭랜드. 다행히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화상(畵商) 더크 스트로브가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치료해준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스트릭랜드가 더크의 아내 블랑시와 불륜을 저지르고 동거에 들어간 것이다. 아내를 돌려달라는 간청도 냉정히 거절하던 그는 결국 블랑시까지 버려 그녀를 음독자살로 이끈다. 그 순간에도 그는 죄책감없이 타히티 섬으로 떠나, 원주민 여인과 살면서, 자신의 예술혼을 마음껏 발산한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경탄을 자아낼 만큼 깊고 아름다웠다. 비로소 그가 오랫동안 갈망하던 ‘예술의 극점(極點)’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한센병에 걸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붓을 놓을 수 없었던 그는 시력을 잃어가는 중에 오두막 벽에 역작을 남기게 된다. 그 벽화를 본 닥터 쿠트라는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이라고 경탄한다. 하지만 “오두막 벽화를 불에 태우라”는 스트릭랜드의 유언에 따라 불이 붙여지고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시대는 ‘꿈의 불임(不姙)’을 산다. 실패와 패배가 두려워 지나치게 몸조심한다. 이런 세상에 이미 확보된 ‘6펜스의 삶’을 버리고 나이 마흔에 ‘달의 공간’으로 이주(移住)하는 스트릭랜드의 발걸음은 사실 ‘혁명적 발걸음’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말미(末尾)는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스트릭랜드는 임종 직전에 위대한 작품을 남긴 ‘천재성’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신화적 존재가 된다. 그 결과 ‘이제까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라는 질문은 철저히 함구된다. 따라서 지난날 온갖 부도덕적 행위는 한 순간에 사면된듯 하다. 마치 작곡가 바그너가 깔끔하지 못한 금전문제, 유대인 혐오발언, 그리고 패륜에 가까운 여성편력으로 얼룩졌음에도, 그가 창작한 극음악 <니벨룽겐의 반지>가 들려주는 웅대한 선율에 전율한 ‘바그네리안’에게는 그의 파행(跛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듯 말이다.
‘작가의 예술적 재능과 인격적 됨됨이가 부합하지 못한 작품은 가짜다”라는 발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천사의 재능만 있으면 악마의 도덕 같은 것은 결격사유가 되지 않는 것, 곧 “천재(天才)에게는 모든 것이 용인(容認)된다”라는 ‘예술지상주의’가 자칫 오독(誤讀)될 때 발생할 위험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오늘날 ‘재능’이 ‘인격’을 따라가지 못한 채 인기를 영위하는 대중스타들을 본다. 곧 다가올 그들의 결말이 두렵다. 문득 저녁 하늘을 보니 상현달이 떠있다. 이제 주머니에서 은색동전만 꺼내면 ‘나만의 달과 6펜스’가 되는 것이 아닐까?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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