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공> 다니엘 페어 지음, 베르나르두 카르발류 그림, 민찬기 옮김, 그림책공작소, 2020년
<예술과 중력가속도>, 배명훈 지음, 북하우스, 2016년


망했다. 초여름 나른한 날씨에 노곤해져서 온라인 서점에 올라온 새 책이나 하릴없이 살펴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머릿속 아이디어를 누군가가 순식간에 털어가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책 구성을 다르게 만들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림책 <노란공>에서 바로 실현한 것이다.
<노란공>은 테니스 시합으로 시작하며, 서로 치고받던 노란 공이 사라지면서 테니스를 하던 두 아이가 잃어버린 공을 찾아 페이지를 넘나든다. 그러니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서 읽건 상관이 없다. 마치 상대방의 리시브에 따라 어떻게 공을 받아칠지 순간순간 결정하는 테니스처럼 시공간을 넘나들며 새로운 차원의 흥미진진한 랠리가 계속 펼쳐진다.
이어 소설 <예술가와 중력가속도>를 만났다. 시장성을 따지기 어려운 ‘예술’이라는 단어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 ‘중력가속도’라는 단어를 합쳐서 책 제목을 정하다니. 게다가 표지의 난해함은 한술 더 뜨는데, 밤하늘의 달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큐브 속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공중곡예를 한다. 과연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책의 저자는 故 박완서 선생님을 포함한 엄청난 팬덤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만 몰랐나 보다.
그런데 이 책 또한 심상치가 않다. 작가가 10년 동안 써온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기 때문에 어느 편을 먼저 읽건 아무 상관이 없으나 한 편씩 추가로 읽을 때마다 각각의 단편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동일하다거나 모종의 사건들이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의미적으로 유사하다는 등의 다양한 장치 때문에 결국에는 긴밀하게 엮였다. 하여, 나는 이내 <예술과 중력가속도>라는 책 속에서 노란 공을 찾아 돌아다니는 테니스 치던 아이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내가 어디를 읽고 있었더라. 아, 맞다. 두 번째 단편 ‘스마트 D’. 스마트 D의 세계에서는 컴퓨터 자판 가운데 영어로 ‘D’에 해당하는 ‘ㄷ' 자판의 타이핑 횟수에 따라 비용을 돈을 내도록 강요한다. 생각해 보면 한글날을 기념하며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잠시 기억할 뿐이지 우리는 글꼴을 사용할 때 만든 이들의 노고에 대해서 별다른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글꼴을 소비한다. 여기에 뿔난 이들의 반동이라고 할까.
어라? 어찌된 일인지 방금 내 컴퓨터 창에도 스마트 D가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들어 왔다. 아, 하필 원고를 쓰는 이 순간에 스마트 D가 떨어지는 건 뭐람? 스마트 D에 등장하는 인물 ‘은경’이 <예술과 중력가속도>라는 책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누설해야 하는데…. 다시 스마트 D가 여덟 개만 남았다는 경고 창이 열렸다. 방금 앞 문장에서 네 개를 사용했으니 이제 다시 스마트 D를 구입하여 제대로 된 원고를 작성하겠습니-. 이런 전부 써버렸-. 나 이거 참. 그럼.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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