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이야기를 붙잡다

‘이야기’는 ‘기억’에 기록하는 역사
언어학자들은 ‘이야기’의 영문표기 ‘스토리(story)’가 ‘벽에 써놓은 이야기’라는 뜻의 라틴어 ‘스토레이(storey)’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한다. 고대 로마에서는 국가의 중대소식을 광장에 설치된 대형 벽면에 이야기로 써놓았다. 따라서 로마 시민들은 그 이야기를 읽고 환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했다. 곧 그 벽의 이야기는 당시 로마의 감정선(感情線)을 결정하는 강한 힘이었다.
또한 고대시대에는 먼 곳의 소식(정보)을 들을 수 있는 통신망이 취약했다. 따라서 그 역할은 각국을 유랑하며 문화를 체득한 음유시인들의 몫이었다. 고대 권력자들은 국가의 특별한 날에 음유시인들을 초대하여 그들이 노래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었다.
성서의 민족 히브리인들 역시 유월절을 맞이하면, 아버지는 식탁에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나누면서, 과거 출애굽 해방을 이루신 하나님의 신비와 환희를 자녀들에게 ‘구두(口頭, 이야기)’로 들려주며 감사했다. 그 자녀들이 이후 가정을 이루면 ‘그때 들은 그 이야기’를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야기해준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말(이야기)’은 ‘기억(記憶)에 기록한 역사(歷史)’였다.
언어 연구학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교수 존 닐(J.Niles)은 저서 <호모 나랜스>에서 “인간은 이야기하려는 본능이 있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이해하는 존재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인간)’라고 규정했다.

생각하는 힘 잃은 것이 ‘타락’
시인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 중 제 1비가에서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라고 노래했다. 배려, 섬김, 희망, 감사 같은 ‘아름다운 것’들은 원망, 욕망, 절망 같이 ‘삶을 죽이는 말’을 멸시한다는 것이다.
사실 삶은 비극과 희극이라는 두 줄을 얽어 만든 의복과 같아서 ‘늘 비극’도 아니고 ‘항상 희극’도 아니다.
따라서 삶이란 한쪽 눈으로 보면 비극만 보이고, 두 눈을 다 뜨고 보면 희극도 보이는 신비이다. 그런 이유로 절망에 대한 발언을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생각은 ‘말의 저장고(貯藏庫)’이다. 따라서 생각이 죽은 자는 ‘죽은 말’을 한다. 그들이 쏟아내는 자극적인 말은 향기(香氣)보다 악취(惡臭)에 가깝고, 그들의 감미로운 말은 향수(香水)가 아닌 부패(腐敗)에 더 가깝다. 그 결과 내 곁의 사람들이 꿈꾸고 있는 희망에 상처를 입혀 끝내 그의 미래까지 살해(殺害)한다.
그러나 삶의 시력(視力)이 좋은 사람은 지옥에 있어도 천국을 발견한다. ‘빛나는 별의 배경은 오히려 어둔 밤’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자신에게 닥친 질곡 속에서도 신비를 발굴하게 되고 깊은 묵상과 관조(觀照) 속에서 감사의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생각하는 힘을 잃은 것이 타락이며, 사랑하는 힘을 잃은 곳이 지옥이다”는 분명 진실이다.

걷다보면 어느덧 ‘하늘’을 날게 되리니
날카로운 못은 위험하다. 찔리면 파상풍에 감염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기에 숙련된 목수는 작업을 할 때 장갑을 착용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위험한 못이 있다. 그것은 ‘못 참겠다. 못 하겠다. 못 살겠다’라는 우리의 언어와 생각 속에 박혀있는 ‘못’이다. 이 ‘못’에 찔리면 삶은 절망에 물든 지옥을 살게 된다.
교육학자 레오 부스카글리아의 “사는 것이 지겹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는 이런 의미에서 한 말일 것이다.
병세가 깊어 올겨울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할아버지가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을 보며 슬퍼하자, 그 겨울을 길게 만들기 위해 그날부터 2년간 온 가족이 겨울옷을 입은 채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했다는 이야기, 그 결과 할아버지는 가족이 만든 이상하게 긴 겨울동안 밝게 웃으며 사셨다는 이야기는 우리 삶에도 아직 채굴(採掘)되지 않은 기적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제공해준다. 그러니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우선 첫 발을 내딛어라. 그렇게 그 길을 걷다보면 어느덧 하늘을 날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김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 ‘살아있는 말(이야기)’은 어린아이에게는 ‘꿈’을, 젊은이들에게는 ‘철학’을 생산시키는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 어린아이에게는 ‘꿈’을! -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녀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두 가지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하나는 ‘뮈토스(Mythos)’이며, 다른 하나는 ‘로고스(Logos)’이다.
‘뮈토스’는 신(神)을 등장시킨 이야기로서 인간에게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교훈이 목적이고, ‘로고스’는 그 반대로 인간의 학문과 철학을 통해 ‘운명에 굴복하지 말라’는 훈육을 위해 만든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뮈토스’와 ‘로고스’를 정교하게 융합한 최고의 이야기이다. 그리스의 어린아이들은 이 두 작품을 이야기로 들으면서 절망에 맞서 투쟁하는 법, 불의에 항거하는 살아있는 양심을 체득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나갔으며, 자신들이 속한 국가를 견실하게 건축해나갔던 것이다. 특히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가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귀향하는 항해 이야기에 자극을 받은 그리스 아이들은 후에 해상무역의 일원으로 성장한다. 그 작품 속 ‘서사(敍事) 이야기’가 어린 가슴에 ‘꿈’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 젊은이에게는 ‘철학’을! - 고대 스파르타의 청년들 사이에 금기어가 있었다. 그것은 “이젠 틀렸어”라는 ‘체념의 언어’였다. 이 말은 곁의 사람에게 좌절과 불안을 감염시키는 불온(不穩)한 말이라는 이유에서다. 사실 젊은이가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말에 쉽게 굴복하는 것은 삶의 패착(敗着)이다. 젊은이의 특권은 노년과 다르게 시간이 아직 자기편이라는 것과 몇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 시대 젊은 세대들이 작은 불편과 고통에 대한 ‘면역(免疫)’을 상실한 듯 보여 안타깝다.

이렇게 왜소해진 젊은 세대에게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는 저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시간에 차라리 뼈나 추려라. 그게 살길이다”라고 일갈한다.
굳게 얼어붙은 가슴을 깨트리는 도끼 같은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도끼의 언어’는 젊은이들에게 자기 성찰이라는 철학을 선사해준다.

시대의 우울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지만, 인간은 ‘말’로 ‘자기 삶’을 창조한다. 따라서 가슴에 희망을 주는 착한 이야기는 삶을 재건(再建)해주는 강한 힘이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마치 장마철 침울하고 눅눅한 곰팡이 같은 이야기에게 점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희망을 말하는 변사(辯士),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꾼, 선한 길을 알려주는 길라잡이 같은 ‘호모 나랜스(Homo Narrans)’가 종적을 감춰 이 시절이 ‘시대의 우울’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희망을 주는 이야기로 시대를 세워나가야 한다. 문득 지금 당신의 ‘스토레이(storey)에는 ‘어떤 이야기’가 수록(手錄)되고 있는지 참 궁금해진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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