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이야기를 붙잡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70년이 지났지만 아픔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는 6·25전쟁. 아직도 답을 얻지 못해서 우리는 여전히 전쟁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는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의 말처럼 6·25도 현재사다. 한 겨레가 나뉘어 다투고 싸워 남은 상처들이 남과 북 모두에 남아 영향을 주고 있다.
역사 속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당시를 되새겨 본다. 남는 것은 ‘이야기’뿐. 충격과 공포, 죽임의 이야기로 점철된 6·25이지만 그 안에서도 ‘삶’이 있었을 터, ‘살림의 이야기’를 찾아 역사신학자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명예교수ㆍ사진 좌)를 찾아갔다.


왜 역사인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봅니다. 메모리 앤 비전(Memory and Vision).”
이덕주 교수는 과거 기억을 잘 정리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했다. “역사를 온당히 정리해야 전망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기억이 비전을 제어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대표적 보기가 6·25인데, ‘피해자-가해자’라는 이분법으로 보면 그 기억에 매여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6·25만 생각하면 분노하고 (남과 북이)서로를 불신하며, 폭력으로만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과거의 아픈 기억에 매여 있으면 그 기억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 매임으로부터 풀리는 것은 오직 신앙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음으로는 (북한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면 (북한에 대해) 전투적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데 극복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망각하거나, 종교적으로 승화시켜 극복하거나.”

이덕주 교수는 6·25 당시에 이미 아픔을 극복한 이야기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하여 그를 통해 들은 6·25 속 아름다운 이야기, 그 주인공들의 삶을 이제-여기에 소환한다.

행위(doing)가 아닌 존재(being)를 일깨운 김유순 목사
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에 서울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갔다. ‘우리 국군이 잘 막고 있다’는 오보를 믿고 있던 목회자와 성도들 중 아직 많은 이들이 서울에 남아있었는데, 공산당이 서울에 들어온 것이다. 이덕주 교수는 이 때 서울에 있던 목회자들이 두 부류로 나뉘었음을 언급했다. ‘사수파’와 ‘도강파(피난파)’이다. 사수파가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을 사수하자는 이상주의자였다면 도강파는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기고 생명을 지키자는 현실론자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서울에 남아있던 감리교 지도부도 두 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상론자들은 순교, 현실론자들은 피난을 이야기했지만 갑론을박 하는 가운데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 감리교 총 지도자 김유순 목사는 ‘결정’을 내려야 했지요. 양측 간에 의견이 팽팽했으니 결국 감독에게 결정권을 준 것입니다. 오랜 침묵 끝에 김유순 감독은 목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질문을 던지니 참석자들은 당황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doing(행위)’의 문제에 매여 있을 때 김 감독은 ‘being(존재)’의 문제를 이야기한 것이고 나는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 10장 11절)는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존재론적 성찰이 당시 목회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그 목회자들이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만춘, 서태원, 조상문, 방훈, 전진규 목사 등 당시 서울에 있었던 중진급 (감리교)목사들은 ‘양이 있으면 목자도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사역했어요. 피난가지 못한 성도들은 대부분 노약자들이었습니다. 돈 있고 건강한 사람은 이미 피난을 갔지요. 기댈 곳이라고는 교회 밖에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위해 새벽기도하고 심방하며 선한 목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남은 자들과 함께한 지도자들은 인민군이 퇴각할 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또한 인민보위부에 잡혀서 북쪽으로 송환되어 가는 도중에 죽고, 도착해서도 죽으며 순교자의 길을 갔다. 존재론적 질문을 던졌던 김유순 감독도 그렇게 그 길을 걸었다.

배에서 내린 손양원 목사
기독교의 사랑과 봉사, 희생정신으로 일제치하를 견뎌온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는 6·25 전쟁 중에도 이어진다.

“당시 서울이나 북쪽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여수에까지 내려갑니다. 손양원 목사는 당시 내려온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실망의 기색을 드러내며 “여러분들이 여기 와있으면 여러분들이 두고 온 양들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질문하지요.
그러다가 공산군이 여수까지 들어오니까 여수지역 목회자들이 부산으로 피난 갈 배를 구했습니다. 당시 애양원교회에는 한센병 환자 가운데 장로도 있고 집사도 있는데, 한 장로가 손양원 목사에게 ‘목사님, 교회는 저희가 지키고 있을 테니 배를 타시지요’라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배를 탔는데, 배가 부산으로 떠나려는 순간 배에서 내려 다시 교회로 돌아왔어요. 도저히 양을 두고는 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의해 검속된 손 목사는 같은 달 28일 여수의 한 과수원 골짜기에서 순교하였다.

좌-우를 아우른 서기훈 목사
“강원도에서는 6·25전쟁을 톱질전쟁이라고 해요. 이쪽에서 밀고 올라가면 저쪽 사람이 죽고, 저쪽에서 내려오면 이쪽 사람이 죽고. 밀고 당기는 연속이었지요.”
철원은 38도선 이북지역으로 6·25 이전에는 공산당의 통치를 받았다. 서기훈 목사는 철원 장흥교회 목사로 그 시기를 살았다. 1882년생인 그는 6·25 당시 69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서로 먹고 먹히는 전쟁이 지속되는 중에 교회를 지켰다.

“서기훈 목사는 6·25전쟁 중 선한 목자의 심정으로 교회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그 지역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미처 올라가지 못한 좌익계 사람들이 우익 청년들에 의해 체포당했습니다. 얼마 전 인민재판을 당하면서 우익계 인사들이 처형당한 경우가 있으니 그 분노가 엄청났겠지요. 형이 집행될 때 서기훈 목사가 우익계 청년들을 향해 말합니다.”

“야 이놈들아! 내가 너희를 이렇게 가르쳤느냐? 난 이제 이곳에 있을 수가 없으니 떠나련다.”

“짐을 싸는 서 목사에게 청년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가 너희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 갚으라고 가르쳤느냐? 결국 내가 잘못 가르친 것이로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총을 겨눈 사람도 교인, 당하는 사람도 교인인 상황 속에서 서 목사는 원수 사랑을 외쳤다. 우익 청년들은 서 목사의 가르침대로 풀어주었고 좌익 청년들은 살아남았다. 톱질은 계속되었지만 이후 다시 중공군과 인민군이 철원을 점령할 때 그곳에서는 ‘복수극’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서 목사의 손길이 우익 청년들에게로 향한다.

“휴전되기 전에 철원에서는 무수히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서기훈 목사는 계속 그곳을 지킵니다. 중공군이 내려오자 이번에는 우익들이 지하에 토굴파고 들어가서 숨게 됩니다. 서 목사는 매일 새벽마다 교회 종을 치며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그들에게 알렸지요. 그리고 토굴 심방을 합니다. 토굴 속에 들어가면 위치가 발각될 수 있으니 근처에서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어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마을 소식도 알렸지요.”

“자네 부친이 어제 돌아가셨네, 날짜를 잘 기억하게.”

철원은 다시 남한 군대가 점령하게 되고, 서 목사는 인민군에 이끌려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그런 상황을 예측했던 장흥교회의 한 권사는 서 목사에게 “목사님은 하실 만큼 다 하셨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떠나십시오”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이 때 서 목사가 그 권사에게 남긴 쪽지가 전해진다.

사어당사 비당사 생이구생 비시생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
죽을 때를 당하여 죽는 것은 참 죽음이 아니오, 단지 살기 위해서만 생을 구하는 것은 진짜 사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면역’ 키우는 힘
이야기는 법이나 규칙과는 달라서 듣는 이에게 어떤 행위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듣는 이가 이야기 속 가르침들을 내면화해서 새롭게 다가오는 상황들에 대처할 수 있게 한다. 법과 규칙이 ‘치료제’라면 이야기는 ‘면역’을 키우는 힘이다. 어려운 일들이 다가올 때 그 힘든 상황들을 초극하는 밑힘이 되는 것이다. 이덕주 교수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현실을 마주하는데 필요한 힘이 되기를 바라본다.

박스 / 남과 북의 사람으로 살며
“여러분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박예영 이사장은 2002년 한국에 온 북향민이다. 박 이사장은 북한을 떠나고 한국에 오는 과정 중 태국 한인연합교회에서 기독교에 입문했다. 이후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탈북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체험’을 주제로 연구하고 현재 통일시대를 준비하며 ‘북향민 경제공동체’를 꾸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
북향민으로서 신학을 공부하고 활동한 특별한 이력 때문에 많은 교회와 단체들에서 강의 요청을 받는다고 한다. 강의 중 일어난 6·25와 관련된 박 이사장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 집회에서 어떤 장로님이 먼저 강의를 하셨습니다. 북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멸시하는 표현과 함께 복음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이어져 북향민으로서 안타깝고 마음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꾹 참고 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문득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정말 불쌍하다 여겨져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찬양을 ‘북한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민족’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문을 이렇게 열었습니다. “여러분 잘못했습니다. 북한이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6·25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저는 전쟁 당사자가 아니지만 인위적인 것이 아닌 내면으로부터 나온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


그런데 박 이사장의 진정성 있는 이 말을 듣고 몇 사람이 찾아왔다.
“강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탈북민을 거북스러워했습니다. 왜 우리나라에 와서 세금 뜯어먹고 있냐고요. 이제 품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당사자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북한분이셨고 전쟁 때문에 피난 오셨는데,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돌아가실 때까지 그리워하며 눈물로 사신 걸 보며 북한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회개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박 이사장은 “남과 북이 모두 가인이며 동시에 아벨이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먼저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는 ‘용서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민대홍
본지 객원기자. 서로교회 담임목사로 파주 출판단지에서 문서사역과 목회를 하고 있으며, 숭실대학교에서 ‘한국기독교 역사관’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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