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만 해도 아이들이 흰머리를 하나씩 뽑으면 용돈을 주기도 했는데, 얼마 사이에 용돈을 줄 수 없을 만큼 흰 머리가 많이 자랐습니다.

저는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십대와 이십대는 허무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루하루는 재미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허무함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절망, 무능력, 그 시간이 쌓여가며 사람이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다시 이십 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는 여전히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사랑하는 이를 면대 면으로 만나고픈 열망, 또 한 편에서는 생을 살아가는 게 쉽지 않아서 고민의 흔적을 훌쩍 뛰어넘고 싶은 얄팍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너무 부끄럽지 않게 주님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마음이 바빠서 며칠 전부터 해야 할 일이 뒤엉키고 있는데, 어지럽고 불편한 마음을 정돈하기 쉬운 방법 하나는 ‘내 기준’을 흔들어 놓으면 됩니다. 오늘까지 꼭 해야 하는 마음, 사람들과 아이들이 내가 이끄는 데로 동의해 주고, 따라와 줬으면 하는 마음, 여기까지, 오늘까지, 목표와 기준들. 어질러지고 수습되지 않는 상황들, 문제들, 책임감….

내가 가진 기준들을 흔들어주면, 내 계획과 결심이 세상의 중심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그제야 나는 숨을 돌리고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여전히 늙고 싶다는 소원을 품고 있지만 나는 운동도 하고, 먼 숲을 쳐다봅니다.
주님이 내게 맡기신 하루, 주님이 내게 맡기신 사람들, 주님이 맡기신 인생이기에 나는 기쁘고 즐겁고 감사할 것입니다.

이요셉
색약의 눈을 가진 다큐 사진작가. 바람은 바람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그늘은 그늘대로 진정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글과 사진과 그림으로 노래한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