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치워버려야 우리가 살아요,
아버지,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래 그렇게 믿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불행이에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오빠일 수 있지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3개의 F’가 필요하다. 그것은 각각 Faith(신뢰), Family(가족), Friend(친구)이다. 실력과 능력이라는 두 개의 척도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이 시대에 그나마 자신의 약함과 허물을 살뜰하게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3개의 F’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3개의 F’가 사람에게서 사라져버린다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체코 출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소설 <변신>에서 그 한 면을 기이한 형태로 들려준다.

5년 전 파산한 아버지로 인해 가난하게 된 가족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져야 했던 청년 그레고르 잠자.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깬 어느 날 아침, 발견한 것은 온 몸이 ‘갑각류 벌레’로 된 자신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6시 30분, 직물 외판원이었던 그레고르는 새벽 5시 기차를 타야 영업소에 갈 수 있는데 너무 늦었다.
그러나 아버지 빚을 갚기 위해 회사로부터 거액을 빌려 해고되면 안 되었던 그레고르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몸부림을 치는 사이 직장 지배인이 그를 찾아온다. 결국 벌레로 변신(變身)된 그레고르를 목격한 지배인과 가족은 충격을 받고, 이후 그레고르는 자신의 방에 감금된 채 살아야 했다.
처음에는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던 ‘벌레’로 변신(變身)된 그레고르를 ‘가족’으로 여겨 돌보아주던 식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그레고르를 ‘진짜 벌레’로 취급하며 멸시하게 된다. 그레고르가 돈을 벌지 못하니 가족들은 하숙인들을 들여 그 생계를 이어가게 되고, 좁은 집에 하숙인들이 입주하니 집안의 잡동사니들은 그레고르의 방으로 옮겨져 방은 창고로 ‘변신(變身)’된다.
벌레가 아닌 ‘아들’과 ‘오빠’라는 가족으로 예우를 받고 싶었던 그레고르는 몇 번이나 방을 탈출하여 가족들이 머무는 거실과 식탁으로 가지만, 그때마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존재를 감추고 싶었던 가족들은 오히려 불안과 분노를 드러낸다. 특히 아버지의 적대감은 그레고르를 공포에 몰아넣는데, 급기야는 가족이 그리워 문밖으로 기어 나온 벌레 그레고르를 보고 분노하여 사과를 던져 등에 박히게 한다.
그러나 그레고르를 더 아프게 한 것은, 아끼는 여동생 ‘마르타의 변신(變身)’이었다. 바이올린 연주를 좋아하는 마르타를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음악학원에 등록을 해주려 할 만큼 아꼈던 마르타가 벌레가 된 오빠를 향해 던진 말, 곧 “이것을 치워버려야 우리가 살아요, 아버지,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오래 그렇게 믿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불행이에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오빠일 수 있지요? 자신이 동물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진즉에 자기 발로 떠났어야지요”.
여동생으로부터 “이것”이라고 불리는 순간 그레고르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 결국 그날 그레고르는 새벽 교회 종소리를 들으면 숨을 거둔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의 죽음을 발견한 가족은 신(神)에게 감사기도를 한 후 여행을 떠난다. 그것은 지난 3개월간 흉측한 벌레와의 동거 속의 고통을 위로하는 여행이었다. 여행 중 부모들은 벌써 숙녀로 다 자란 딸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그 희망이란 ‘죽은 그레고르’의 역할을 대신해줄 ‘딸’이 새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작가 밀란 쿤데라로부터 “검은 색의 기이한 아름다움”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라는 뜻의 자신의 이름처럼 불안과 우울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던 작가였다. 왜소한 몸의 카프카는 유대인으로서 체코사회에 유입되지 못하였고, 경제적 능력을 위해서 법대를 진학시킨 아버지와 문학을 하고 싶었던 부자간의 갈등, 더구나 사랑하던 여인들의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로 인해 세 번의 파혼을 해야 했던 카프카였다. 특히 아버지는 카프카에게 “내 삶의 기생충”이라는 극언까지 한다. 결코 가까이 다가서기가 두려웠던 아버지, 따라서 멀리 피하고 싶었던 아버지에 대한 공포, 카프카는 벌레가 되어서라도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자신의 속내를 소설 속 그레고르의 모습에 투사(投射)했는지 모른다.

소설 <변신>은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이 되어줄 줄 알았던 ‘가족’이라는 견고한 성(城)이 ‘돈’에 해체될 수 있는 모래성이며, 능력에 따라 가족 역시 ‘타인(他人)’으로 ‘변신(變身)’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작품을 덮을 때 잊어지지 않은 장면은 등에 박힌 사과를 몸에 지닌 채 죽어간 그레고르의 마지막 모습이다. 어떤 이유로 가족들은 등에 박힌 썩은 사과를 뽑아 줄 ‘작은 배려’ 조차 거절한 것인가? 사실 가족은 ‘서로의 등에 박힌 아픔을 뽑아주는 관계’이어야 하지 않을까. “가정은 서로간의 능력이 아닌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이며,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라는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이 오랫동안 귓가에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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