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취업 성공했어요. 인재를 알아보는 곳이 있네요. ㅋ’
민호의 메시지에서 들떴을 목소리가 떠오른다. 몇 해 만에 은둔상태를 벗어나, 취업을 준비해보겠다고 선언한 뒤로 별 다른 소식이 없던 민호. 작은 커피 로스팅 회사의 판매 직원으로 채용이 되었다고 한다. 스물일곱 살 민호의 첫 번째 취업이다.

열일곱 살 무렵부터 학교를 가지 않고 은둔생활을 시작했던 민호는 십년에 걸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상과 부닥치고 만나면서 사회로 한발씩 걸어 나왔다. 어떤 때는 당장 큰 성공을 이룰 것처럼 달려 나가다가, 또 얼마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좌절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청각장애와 언어장애가 있는 부모,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야 하는 경제형편, 부모 영향으로 집안에서만 살아와 제때 성장하지 못한 인간관계경험, 자존심 강한 민호가 어릴 때부터 쌓아온 분노, 두려움, 자존감의 상처.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극복하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은 하나하나가 깊고 무거웠다.
민호가 계속 고립되어 있었다면, 혼자 힘으로 이 문제들을 넘어서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자신을 공격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와야 했으니까. 다행히 민호의 곁에는 많은 동행자들이 생겨났다. 세상과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던 민호에게, 특별한 마음을 가진 어른들과 선배들이 있었고, 그들이 민호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민호의 동행자들
민호의 첫 번째 동행자들은 별빛학교(가명)라는 대안학교 선생님들이었다.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민호에게 일반학교는 지옥이었다. 거기에서 민호는 가난하고 공부 못하고 모난 성격의 이상한 아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빛학교 선생님들은 민호의 ‘만만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민호의 놀림과 장난도 받아주고 어설픈 지식 자랑을 묵묵히 들어주며, 상처를 회복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시간을 벌어주었다.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서, 자기 방 안으로만 숨어들던 민호는 이 곳을 통해서 세상에 몇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 다음 동행자들은 직장체험이나 인턴십을 통해 만난 어른들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당장 취업을 하거나 대학에 진학할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민호는 비영리단체나 사회적기업 몇 곳에서 직장체험을 했다. 그 곳의 선배들, 어른들이 두 번째 동행자였다. 별다른 기술이 없고 의사소통이 서툴고 책임을 두려워하는 민호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고 차근차근 설명해주며 무엇을 잘하는지 알려 주었다. 민호는 그때 ‘나도 세상 속에서 뭔가를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조금 맛볼 수 있었다.
20대 중반 무렵, 민호에게는 다시 한 번의 고비가 왔다. ‘빈곤’, ‘가족의 부재’, ‘다른 또래들과의 삶의 격차’라는 세상의 모순들이 극명하게 다가오는 시절이었다. 민호는 우울해지기도 하고 과격해지기도 하고, 기약 없이 사라지며 은둔하기도 했다.
이때는 청년 공익활동 모임에서 만난 또래들이 동행자가 되었다.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이름표를 달지 않고 평범한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만난 첫 친구들이었다. A는 부모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와 거처가 없던 민호에게 대가없이 집을 내어주며 같이 살아주었고, B는 민호가 해보고 싶어 하는 매니아적인(참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동아리 활동을 함께 계획하고 참여해주었다. C는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로 폭력적이고 과격한 모습을 보이던 민호를 외면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끝까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A, B, C 또래 친구와 선배들의 동행 덕분에 민호는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건강한 마음을 가진 또래들이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온 민호의 인간관계를 훨씬 더 풍요롭게 해주었다.
가장 최근의 동행은 정부지원사업으로 한 달간의 편의점 직장체험을 하면서 만난 책임자 D였다. 이전과 다른 점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민호도 책임자 D에게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는 점이다. 민호는 직업생활과 사회생활에 대해 얼마간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돌아보면, 웃음이 난다. 민호라는 한 청년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던가. 민호, 너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니, 하는 생각.

올라설 계단이 남았지만
취업했다는 소식 이후로, 민호가 며칠째 소식이 없다. 이렇게 침묵이 길어지면 어떤 좋지 않은 상황이 생겼다 예상할 수있는데 그 예상은 여지없이 현실이 된다.
“그냥, 출근 안하기로 했어요.”
“저한테 너무 많은걸 기대해서요. 기대에 부응할 자신이 없어요.”
일단 시작해 보라고,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거라고 일장연설을 해도 소용이 없다. 자신은 아직 이만한 폭의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물러서버린 것이다.
조급해지고 답답해지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민호에게 이 계단을 함께 올라줄 어른이나 친구가 또 필요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또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천천히, 더 천천히. 기다려야지.

이정현
대학에 가지 않고 길을 찾는 청년을 위한 자립학교인 사회적협동조합 ‘일하는학교’의 사무국장. 더듬더듬 길을 찾아가는 청년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다해 동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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