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로 방송을 하던 15년의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은 아침 7시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과 저녁 7시 뉴스를 진행하던 4년여의 시간들이다. 어떤 애청자분은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를 켜면 나오고, 저녁에 퇴근해 TV뉴스를 켜면 또 같은 사람이 나온다며, 나에게 ‘7시의 여자’라는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새벽 6시와 오후 4시, 하루에 두 번 출근을 하고, 비어있는 낮 시간에는 대학원 석사과정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아침 7시에 피곤한 목소리로 라디오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새벽 4시면 깨어나 운동을 하고, 분장실에서 대학원 과제를 하고, 방송용 메이크업을 다 해놓고 서강대교를 건너 대학원 수업을 들은 뒤, 여의도로 돌아오면 바로 의상을 갈아입고, 그 날의 원고를 받아들고선 뉴스에 들어갔다.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남은 과제를 하고, 쓰러지듯 잠들면 다시 새벽에 시작되는 하루. 멀리 내다볼 틈도 없이 하루하루만 살았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 어느 봄날이었다. 뉴스에 들어가기 5분 전, 평소 같으면 스튜디오에 서 큐시트와 뉴스 원고를 부지런히 확인하며 최종 확인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나도 모르게 앞에 놓인 TV 모니터들만 멍하니 주시하고 앉아있었다. 그런 내게 뉴스 파트너 선배가 말을 건넸다.
“하루하루가 참 똑같지? 아주 지겹게도 반복되지? 매일 똑같은 자리, 똑같은 일, 똑같은 사람…. 그냥 별 탈 없이 무난한 하루인데 왜 이렇게 힘든 건가. 왜냐면 사람은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걸 견디는 게 참 힘들거든. 그런데 그거 알아? 그게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이다. 일상의 힘. 그게 가장 무서운 거야.”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돌아왔다. 왜 힘든지조차 모르고 달릴 줄만 알던 내게 마치 묵직한 ‘중심추’를 건네준 것 같았다. 그 날 이후, 흩날리는 것처럼 느껴지던 하루하루에 이유가 담겼고, 기분 좋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반복되어 쏟아지는 일들을 향해 자신을 몰아칠 줄만 알았던 나는 그 날 이후 모든 순간에, 모든 마음이 함께 머물러야 함을 알게 되었다.

코로나 19라는 거대한 일이 우리들의 일상을 뒤흔들어놓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최소한의 외출을 하며, 그나마도 마스크로 가린 채 서로의 거리를 지키고 있다. 너무 많이 달라진 일상에 필연적으로 적응해나가야 하는 시간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 살아가던 시간이 흐트러지고, 전보다 단순해진 시간 안에서 다잡을 것들을 다잡으며 살아내고 보니, 바쁜 삶의 흐름 속에서 놓치고 살았던 것들이 일상의 수면 위로 분명히 떠오른다. 바깥을 향하던 에너지와 높이를 추구하던 분주함은 내면을 향한, 그리고 깊이를 향한 방향으로 바뀌기도 한다.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만, 실은 바쁘다는 핑계로 단 하나도 내려놓지 못했던 것들을 내려놓게 하는 낯선 시간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나아가며 배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자리, 그리고 모두의 최선은 일상의 힘이 되고, 우리는 그렇게 조금 더 성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서현
전 KBS아나운서.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 객원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만남의 힘>, <뜨거운 위로 한그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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