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사 최병헌 목사 약전 번역 이야기

탁사 최병헌(1858-1927) 목사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종교인이자 민족계몽가로 정동제일감리교회 초대 한국인 담임목사이다. 그의 삶은 자필 한문 약전으로 남겨졌는데, 90여 년이 지나 한글로 번역되어 세상에 나왔다. 격변의 시기를 겪었던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목회자의 시각, 나아가 한 신앙인으로서 바라보며 평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약전 번역자를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와 사회에 왜 최병헌의 이야기가 필요한지를 짚어보았다. <편집자 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역사학자 E.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밝힌 핵심 내용이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이제-여기’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더 깊이 인식할 수 있다는 카의 말은 옛 자료들을 허투루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들에게만 읽혀지던 이야기가 90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탁사 최병헌 목사의 약전(略傳,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이 <개화기 정동을 살다 간 탁사 최병헌과 그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것. 번역자인 김정일 박사(숭실대 기독교학)를 만나 출판 계기와 오늘날 우리들은 최병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사적 동기에서 공공의 영역으로
김정일 박사가 탁사 최병헌 목사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20여 년 전,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가장 친한 친구와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친구 증조할아버지께서 목사님이셨는데 한문으로 약전을 남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관심 있게 들었지만 바빠서 잊고 지냈는데 두 해 전 탁사 후손회에서 번역을 의뢰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사롭지 않았다. 탁사 약전을 번역하면서 역자가 크게 관심 갖게 된 부분은 일반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약전에는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 한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들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보기로 명성황후 시해에 관련된 일본인들의 이름, 당시 공사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지요. 민족의 일이 목사로서 살아야 하는 자신과 구분될 수 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즉, 탁사에게 있어서 민족의 일과 교회의 일은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최병헌은 목사였지만 세상의 문제를 하나님 나라의 일과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한 개인이었지만 민족의 문제라는 공적 영역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여 역자는 <탁사 최병헌 약전>이라는 원제를 바꾸었다.
“우리 민족에게 격동의 시기였던 구한말, 그리고 당시 정치 1번지였던 정동이 탁사의 삶터였습니다. 그의 삶과 생각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제공합니다.”
탁사의 글은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보기다.

“국가 정치 문명이 종교 성쇠에 달려있다. (중략) 이와 같은즉 조선 정치의 문란함은 유교가 쇠락하여 제 구실을 하지 못함에 있도다. 조선을 문명케 함에는 유신한 종교를 실행함이 제일 급무라”(약전, 62쪽)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정리한 그의 생각은 국가와 정치와 문명이 바로 서기 위해서 기독교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를 빼고는 한국 근현대사를 온당히 인식할 수 없다”는 故 박정신 교수(전 숭실대 부총장)의 주장처럼 세상 밖 존재가 아닌 세상 안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해야 하는 교회는 공공의 문제를 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 문제에 관심 갖는 젊은이가 나오기 바라며
“청년이나 배우는 과정 중에 있는 학생들을 포함해서 젊은 기독교인들이 탁사의 삶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인이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젊은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적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에 대해 영감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청년 최병헌은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할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부패의 온상이었던 과거시험장의 모습을 보고 시험장을 박차고 나옵니다.”
부와 권력이 대물림되고, 청년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은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과거를 포기하고 낙심하고 있던 그에게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복음’이었다.
“본래 개혁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던 탁사였지만 기독교는 그것을 더 강력하게 했어요. 친구의 소개로 조지 존스 선교사와 만나게 되고, 성경을 번역하며 기독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그 뒤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정동제일교회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지요. 그분의 주변에 있었던 정동을 살다간 인물들 중에는 서재필, 전덕기, 주시경 등이 있었는데 모두 상동청년회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너져 가는 세상을 변혁하고자 했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그때의 교회는 지금에 비하면 수적으로 아주 보잘 것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은 매우 컸지요.”

20세기 초 전체 인구의 1퍼센트도 되지 않았던 기독교가 문화를 변혁하고 민족의 삶과 영혼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의 자랑거리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도 그러한가를 물을 때 밝은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김 박사는 이 시대 사회와 문화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변혁할 사명이 기독 청년들에게 있다고 답하며, 구한말을 ‘기독교 청년’으로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탁사 약전을 통해 만날 수 있도록 소개한다.

이 시대에도 어른이 필요
약전은 구한말까지만 기록되었다. 노년의 삶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의 노년은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강탈기라는 어두움의 시대가 우리 민족을 덮친 때이기에 그렇다.
“3·1운동 당시에 최병헌 목사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 운동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33인 대표 중 최고령이었던 손병희 보다도 연장자였으니까요. 그런데 천도교 대표 15명 중 14명을 손병희가 지목한 것처럼 감리교 쪽 대표단은 탁사가 추천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인 최초로 감리사를 했고, 협성신학교 교수도 역임했기 때문에 당시 중요한 사안에 대해 물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어른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자랑이자 동시에 교회의 자랑인 3·1운동의 역사에 최병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가르친 후학들과 신앙의 후예들이 그 운동의 주역이 된다. 세상을 변혁하려는 운동을 벌일 때 어른이 든든한 밑힘이 되어준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어른이 절실하다. 젊은이들의 생각을 품어주고 그들의 운동에 힘을 불어넣어줄 ‘어른’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인구 구성으로 보면 거의 세대 간 갈등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 시대의 문제로 인해 고통 하는 젊은이들은 누구에게 삶과 신앙, 그리고 나아갈 길을 물어야 할까. 두루마기 차림에 흰 수염 쓰다듬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을 할아버지 목사님, 최병헌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요구된다.

입신양명이라는 가치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겠다는 삶의 방향 전환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공적이기 때문이다. 김정일 박사는 “최병헌 목사가 기독교를 바탕으로 민족 계몽과 나라의 근대화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지를 고민한 선각자”로 설명하며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탁사의 삶이 선한 영향력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소명과 열정으로 삶을 변혁해야 할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뒷심이 되어줄 어른들에게.

민대홍
서로교회 담임목사로 파주 출판단지에서 문서사역과 목회를 하고 있으며, 숭실대학교에 ‘한국기독교 역사관’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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