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아카데미에서의 ‘말’
올해로 73번째를 맞은 영국아카데미 영화·텔레비전 시상식(BAFTA) 개회사에서 사회자인 그레이엄 노튼은 연기상 전 부문에 백인들만이 후보로 오른 것을 축하하는 듯한 농담을 날려 비난을 받았습니다. “올해, 마침내 백인들이 해냈습니다. 우리가 해냈습니다. (This year, white men finally broke through. We did it.)”
이걸 지켜보던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는데요, 특히 남우주연상을 받은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는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인종적 다양성이 모자란 영국아카데미 측의 입장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의 메시지를 남깁니다.

모두를 포용하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미국 사회의 보수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자기들이 가져가야 할 몫을 흑인과 아시아인들이 빼앗아갔다고 느낀 백인 노동자들의 박탈감이, 결국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죠.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가 의미하는 ‘위대한 미국’은 백인들이 주도하고 독점하는 미국을 말한 것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미국’을 의미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트럼프는 이후 자국의 실리, 특히 백인 유권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챙기는 정책을 펼치는 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 다른 인종과 거대한 장벽을 쌓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영국 또한 다른 민족, 다른 인종에게 영국 사회가 잠식되고 있다는 공포감을 증폭시켜, 결국 유럽연합(EU)을 탈퇴하는 무모한 결정을 했고, 최근엔 유럽의 ‘트럼프’라 불리는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세우게 됩니다. 이런 흐름 가운데 서두에 말씀드린 BAFTA와 같은 해프닝이 터진 거지요.

백인 편향 논란
오스카상으로 통칭하는 제92회 미국아카데미 시상식. 오스카상은 대략 5년 전부터 백인 편향이라는 논란에 휘말려 왔습니다. 투표권을 가진 아카데미 회원의 절대다수가 백인인 만큼, 그동안 철저하게 백인들의 영화가 오스카상을 독점해왔지요. 매우 보수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선정하고, 시상해왔던 겁니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면서, 최근 각종 SNS에 #OscarsSoWhite(오스카상은 너무 하얗다), 또는 #WhiteOscars(백인 오스카)라는 풍자 해시태그를 붙이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이, 지금의 보수적인 오스카상을 주도하는 할리우드가 상당히 오랫동안 미국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목소리를 대변해왔던 곳 중 하나라는 겁니다. 1950년대 매카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 광풍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바로 할리우드였습니다. 수많은 영화인이 색깔론에 휘말려 일자리를 잃었지요. 심지어 찰리 채플린마저도 미국을 떠나야만 했으니까요. 지금도 할리우드는, 점점 보수화되는 영국·미국의 최근 흐름을 앞장서서 비판하면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최고의 작품으로 ‘기생충’이
바로 그곳에 <기생충>이 뜬 겁니다. 작년 5월 프랑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시작으로, 전세계영화제를 휩쓸던 <기생충>은 미국에 상륙하자마자 전미 비평가들로부터 최고의 작품으로 칭송받으며, 전미 영화상마저 석권하다시피 합니다. <기생충>의 영화적 완성도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특히 영화 언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편집’은 거의 교과서라 불릴 정도예요. 그걸 확인하고 싶다면, ‘믿음의 벨트’라는 바로크풍 음악과 함께 8분 동안 펼쳐지는 ‘폐결핵’ 장면을 보십시오. 그 시간 동안 사회 계층과 갈등 문제를 은유와 환유, 텍스트와 서브 텍스트, 그리고 콘텍스트로 발전시키는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오락적으로 쉽고 명확하게 풀어냈습니다. 만듦새도 기가 막힌 데, 영화가 담은 메시지마저도 이 시대에 꼭 맞는 작품이 나타난 겁니다.

다양성에 대한 갈급함
이번에 전 세계 영화계가 <기생충>에 열광했듯이, 작년·재작년 전 세계 영화평론가들은 멕시코 작품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에게 경의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제91회 미국 아카데미는 비영어권 작품인 <로마>에 작품상을 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인터넷 개봉이라는 플랫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아카데미는 최우수 작품상이 수여되는 맨 마지막 순간에 <로마>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할리우드 영화인들에게 다양성에 대한 갈급함을 더욱 키워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막이 깔리는 영화를 외면하고, 유색인종을 혐오하며 자기의 언어(영어), 자기의 유산만을 고집하는 그 오만함이 결국 미국을 이 세계에서 고립시킬 수밖에 없을 거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할리우드의 아카데미상이 말 그대로 ‘미국이라는 동네 영화상’ 정도로 고착될 거라는 거죠.

영국에 이어,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게 된 호아킨 피닉스는 이렇게 수상 소감을 밝힙니다.
“우리는 단일한 국가, 단일한 민족, 단일한 인종이어야 한다는 믿음과 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구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전설적인 여배우 제인 폰다는 자각의 중요성에 대한 일성과 함께, “오늘 밤, 영화가 우리 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에 미쳐왔고,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조명하길 바랍니다”라고 말한 후, 오스카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으로 <기생충>을 외칩니다.

서로에게 기생하는 관계
<기생충>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빈부·좌우를 넘어 국가·인종·남녀·문화 간 갈등의 알레고리로 끊임없이 확대해서 이해할 수 있고, 영화는 그걸 일상 언어를 초월해, 전 세계인이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이쯤 되면, 오스카상을 <기생충>에게 몰아준 할리우드 아카데미에게 봉준호 감독이 고마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할리우드가 <기생충>에게 감사해야 할 상황입니다.
송강호 가족이 이선균 가족에게 기생하지만, 거꾸로 이선균 가족 또한 송강호 가족의 서비스가 있기에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거죠. 이쯤 되면 모두가 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하는 관계입니다. 트럼프는 다른 나라들이 미국에 기생해 이익을 얻어간다고 주장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봤을 때, 미국 또한 그런 나라들에 업혀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러니 영화 속 송강호의 명대사 “참으로 시의적절하다”가 괜히 귓가에 맴도는 건 아닐 겁니다.

ps. 오스카상을 지켜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봉준호’라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 자체였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한국에 온다고 해서 ‘잭슨 마이클’로 불리는 것이 아니듯, 봉 감독 또한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준호봉’일 이유는 없습니다. 자신들만이 세계의 기준이요 표준이라는 오만함을 내려놓고, 이처럼 서로 남의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죠.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수학하고,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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