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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통합에 관하여
한복협 월례회 발표 <사회통합과 기독교의 역할>
[240호] 2020년 02월 01일 (토) 박에스더 기자 hipark@iwithjesus.com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지난 1월 10일 서울 종교감리교회에서 ‘사회통합과 기독교의 역할’을 주제로 2020년 첫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진행했다. 이날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원로)와 박영신 교수(연세대 명예교수)가 발제자로 나서 초갈등사회에 교회가 어떻게 중심을 잡을 것인지 각각 발표하였다. 강연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편집자 주>

<사회통합,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

현존하는 사회는 유토피아에 가까워지기보다 자체 모순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현존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변해야 하고 또 변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에 속한 것인 한 그 어떤 것도 절대화될 수 없고 신성화될 수 없는, 잠정의 정당성을 누릴 수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 생각에 잇대어 사회 통합 문제를 바라보고 풀어보자.

운동 현장의 물림과 엇물림
통합과 갈등의 기묘한 ‘물림’과 ‘엇물림’은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에서 볼 수 있는 ‘지나간’ 역사만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 운동에서, 시민의 운동 영역 곳곳에서 서로 엇갈리는 사람들이 만나 함께 일을 꾸리며 일어나고 있는 삶의 현실이다.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하는 것인지 생각하면서 한 사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는 한 시민환경단체에서 20년 넘게 녹색운동 영역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회원이다. 여기서 상임대표를 10년 넘게 맡은 바 있고, 이어 자매기관의 한 곳에서 지금껏 이사장 일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구성원들의 배경도 가지각색이어서, 종교 신앙을 논한다면 서로 첨예한 갈등을 뿜어내며 밤새껏 논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신앙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이 운동체가 존재하는 게 아님을 익히 알기에, 강령이 밝히고 있는 대로 모두가 “자연을 거스르는 문명에는 인류와 생태계의 미래가 없다”며, “삶과 삶터를 녹색으로 바꾸기 위해” 그리고 “삶의 터전인 지구를 지키기 위해” 함께 만나 일하고 있을 따름이다.
모든 것은 협의와 토론을 거쳐 다수결로 결정한다. 이러한 시민다움의 품격을 함께 익혀간다. 다수결로 결정된 결과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과 신념과 신앙이 자신 속에 굳게 진치고 있어도, 정당한 절차를 밟아 결정된 것인한 그 결정을 존중한다.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서 설득의 논리를 다져가야 할 따름이다.

시민사회의 성숙은 ‘시민다움’
다양한 견해와 주장의 여지는 시민 사회의 성숙도와 비례한다. 오늘날의 시민 사회는 서로 마음의 문을 열어두는 ‘시민다움’을 요구한다. 참여자는 자기 독선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신앙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게 표상되고 표현될 수 있다는 관용의 미덕을 지녀야 한다. 깊은 뜻에서 이 관용은, 인간의 것이란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할 수 없다는 초월 존재에 대한 절대 순종과 인간에 대한 절대 겸허에 뿌리내리고 있다.
초월의 빛 안에 들어오는 현실의 폭은 넓다. 현실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한한 인간인 한 그 누구도 정답의 독점자로 행세하지 못한다. 이 조건 밑에서 인간이 그리는 ‘통합’은 영구히 잠정의 것일 수밖에 없다.

분별된 삶, 건강한 통합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사사롭고 비좁은 친분 관계의 틀에 묶여 살고, 삶의 뜻을 온전히 물질의 풍요에 두고 경제의 힘을 숭상하는 천박한 의식의 틀에 박혀 있는 한, 공공의 삶을 기대하지 못한다. 이 가치 질서에 모두가 합의하고 몰입하여 이것으로 사회가 ‘통합’되고 있다면 이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질병을 치유하려면 병든 사회와 ‘갈등’할 수밖에 없다.
비좁은 삶에서 벗어나 공공의 삶에 동참하여 공동의 선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건강한 통합’을 말할 수 있다.

편협을 벗어나 공동의 선으로 나아가기
통합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갈등은 왜 마주칠 수밖에 없는지, 삶의 현실 안에서 진리를 사모하며 치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집요하게 묻는다. 마땅히 모든 것을 헤아려 새김질하고 가린다.
그리고 공동의 선을 향하여 마음 문 열고 단색의 사람들 그 테두리를 넘어 여러 색깔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편협한 이해관계를 벗어나 더욱 넓은 공동의 선으로 나아가기 위해, 겸허히 논쟁의 자리로 들어가 잠정의 합의와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힘을 모아 서로 도우며 일한다.
공동의 선으로 가는 길은 굴곡지고 험난하다. 공공의 선에 헌신하는 참된 시민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박영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사회통합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통합의 시급성 배후에는 사회갈등과 분열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혹자는 현재의 상황을 전례가 없는 “초 갈등 사회”로 진단하기도 한다.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방안은 갈등이 야기되고 있는 상황과 갈등의 성격과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전문적이고 공감되는 처방을 내어놓고, 나아가 이를 구체적으로 사회의 통합으로 이끌어가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

‘좌’ ‘우’가 아닌, ‘앞’으로
기독교 세계가 갈등을 극복하며 통합을 추구하면서 내세우는 원칙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점이다. 가는 방향은 좌(左)나 우(右)가 아니라, ‘앞(前)’이다. 좌와 우는 방향이 아니라 앞으로 가기 위한 두 날개이다. 인간의 몸은 좌우의 두 팔, 두 다리, 두 눈, 두 귀가 있어 둘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 건강한 몸으로 산다. 갈등을 통합으로 이끌 수 있는 대안은 좌우를 통합하되 ‘앞으로’, ‘미래로’를 공동의 방향으로 수용케 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방안이다.
또 하나 현재 우리사회의 “초 갈등” 현상은 건강한 몸을 지탱하는 건강한 두 팔과 두 다리의 경쟁이나 생산적 갈등이 아니라, 극좌와 극우의 극단주의가 대결하는 파괴적 갈등이다. 그것은 잠언이 경고하는 “빗나감”과 “치우침”의 전형이다. 극단주의는 그것이 극좌이든 극우이든 사회를 경직시킨다. 파괴한다. 빈부 간에 극단으로 치닫는 격차가 그러하고, 노사 간의 처절한 극단적 갈등이 그러하고, 힘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가 갑과 을의 관계로 극단화되어 가는 모습이 그러하고, 잠정적으로 수그러진 모습이나 여전히 극단적 폭발성을 지닌 지역차별과 갈등이 그러하고, 때 늦고 낡은 구시대적 이념갈등이 그러하다.

중심잡기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또 하나의 공동 바탕은 ‘중심 잡기’이다. 통합은 좌우갈등의 적당한 미봉책도 아니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무색무취한 “중립”도 아니다. 쌍방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현장에서 성서가 증언하는 예언자적 사명, 제사장적 사명으로, ‘상생’의 광장으로 이끄는 역할은 중도가 아니라 ‘중심’에 서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중심은 국민이 채택하고 의지하는 ‘헌법’이다.
이 사실을 갈등의 현장에서 분명히 진실과 상생의 잣대로 밝혀주어야 한다. 헌법의 규범을 두고 해석과 적용에 갈등이 있으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빛”에서 이를 밝혀줌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은 한 손에 헌법규범을, 다른 한 손에 성서를 들고 사회 갈등 해소와 통합노력을 경주하되, 헌법을 성서의 눈으로 해석하고 갈 길을 제시함이 옳을 것이다.

사랑 부재는 ‘갈등’, 사랑 회복은 ‘통합’
사회통합의 기초로 삼는 기본가치를 갈등의 당사자들이 공유하고 실천에 옮기는 힘과 동기는 ‘사랑’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여 갈등의 극복과 통합에 나서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는 사랑이기에. 사랑의 부재가 갈등이요 사랑의 회복이 통합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그리고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은 각각 한 동전의 양면이다. 정치적 권력의 체제에서 사랑 없는 자유는 우리 인류의 역사상 권력자의 극우적 파쇼주의 지배를 낳곤 했다. 자유는 항상 상대방 앞에서의 자유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항상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의(義)”의 함정에 빠져서 적대관계의 괴물을 낳고, 우리의 역사에서는 무자비한 극좌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함께 적대적 냉전의 어두운 시대를 만들어 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자기 義’ 함정
사실 우리시대의 사회갈등의 심각성은 상호 포용 가능한 생산적인 상태이거나 상호 교정의 수준이 아니라 적대화, 진영화 되어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념 갈등이 온갖 사회갈등의 블랙홀처럼 역기능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의 길로 들어서려면 하나의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사랑”의 계명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좀먹는 소위 남남갈등 및 남북갈등의 정상이 바로 이것이다. 이웃사랑을 자기사랑처럼 실천하기도 힘든데, 하물며 ‘원수사랑’은 쉽게 베풀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여기 로마서의 해법(로마서 12:17-21)이 있다. 요지는 이렇다.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우리 사회에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나, 갈등이 악종이 아니라 선종일 경우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사회에서 상보적 생산성으로 승화시켜 오히려 사회의 폭과 깊이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갈등이 심각하여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최소한 그 갈등이 불치의 적대관계의 틀로 심화되지 않도록 갈등의 “평화적 관리”가 바람직하며, 이 일을 위해 특히 기독교 사회가 심혈을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박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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