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남원 이슬농원>

김승범 기자가 직접 발로 밟고, 손으로 만지고, 눈과 귀로 보고 들은 특별한 공간을 소개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생각해보는, 사색이 있는 공간들을 찾아서 카메라 렌즈에 담으며. <편집자 주>

한겨울에도 봄을 느낄 수 있는 제주도.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위해 오고 싶어 하는 섬이다. 하지만 아주 먼 시절에는 최남단 유배지이기도 했었고, 조정의 특산물 착취로 물질하던 많은 남자들이 육지로 도망을 가 여자들이 억척스럽게 농사짓고, 해녀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밖에 없었던 척박한 곳이었다.
근대의 역사에서는 이념의 희생양으로 지독한 상처를 갖고 있는 곳 제주. 아름다운 섬의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척박한 삶과 상처와 고통의 역사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이 제주를 좀 더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 같다.

바람, 돌, 여자가 많다는 삼다의 제주 길가에 가로수처럼 보일만큼 많은 귤 또한 빠질 수 없는 제주의 상징이다. 이곳 사람들은 서귀포 남원귤이라 하면 묻지도 않고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귤이 좋은 곳이다. 귤 수확철에 아르바이트 삼아 남원 이슬농장에서 팔을 걷어붙였다. 농원의 주인인 송광호 장로는 농원 전체에 찬송가와 기독교방송을 하루 종일 틀어 놓는다. 열매들이 은혜 받고 잘 자라라는 소망일 것이다.
농장의 전경을 보자니 귤을 딸 마음보다는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1만평 이상의 돌담이 둘러싸인 귤밭 뒤로는 한라산의 정상이 거대한 산성처럼 존재감을 드러낸다. 돌담 사이 길을 걸으며 한 바퀴 돌아보면 마치 스페인의 오래된 포도주 양조장에라도 온 것 같은 고즈넉함이 묻어난다.

귤나무 한그루에 달린 귤의 개수는 어마어마하다. 가지가 힘에 부쳐 꺾일 만큼 열매가 많다. 그래서 귤을 제때 다 따주어야 나무가 쉴 수가 있고 다음해에 열매를 더 잘 맺는다고 한다. 귤을 따며 귤을 꽤 많이 시식했다. 맛을 비교해보기 위해서다. 못생겼다고 맛이 없지 않았고, 잘생겼다고 맛있지 않았다. 같은 나무여도 햇빛을 잘 받고 못 받고에 따라 다르고 가지마다 달랐다. 새들이 먹다 남긴 것이 꽤 맛있다. 맛을 아는 녀석들이다.
작업을 하는 내내 파도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귤나무 사이를 휘젓는 소리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파란 하늘과 바람소리와 새소리 가운데 평소 인식을 안 하던 나의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단순한 노동 가운데 내 내면에서는 또 다른 노동이 시작됐다.
수확 시기에 제때 따주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한 나무가 되듯, 내 내면에 처리하지 못하고 상해가는 자책의 열매, 후회의 열매, 두려움의 열매들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나를 본다. 수많은 실언 속의 교만과 두려움 속의 빈곤한 정신들이라니….

이 농원은 저농약으로 나무 밑에 잡초가 제법 많다. 그럼에도 열매가 좋은 것은 토양에 막걸리 농법으로 영양을 더 해 주기 때문이라 한다. 잡초가 있는 귤밭은 더 건강한 귤밭이다. 토양이 건강하고 영양이 풍부하면 열매는 잡초의 영향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란다.
때에 따라 열매를 솎아주는 주인의 노력이 더 풍성한 열매를 기약한다.
내 내면의 토양의 불온함과 잡초와 같은 걱정들로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모습들. 귤밭 가운데서 만난 하나님께 부탁 할 수 있었다. 제가 붙잡고 있는 이 징한 것들, 하나님이 싹둑 잘라 버려주시라고 .
귤을 따며 나도 모르게 찬양 ‘생명의 양식’에 마음이 끌려 적어도 20번 이상은 부른 것 같다.
귤밭, 거룩한 노동의 시간에 조용히 하나님께 올렸다.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사진·글 = 김승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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