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딸아이가 종이접기에 빠졌다. 네모난 종이 한 장이 고양이가 되기도, 피아노가 되기도 하는 세상은 딸을 마법사가 되게 한다. 어느 날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종이접기 책을 건네며 말한다.
“엄마, 나 이건 도저히 못하겠어. 너무 어려워. 엄마가 좀 해 봐.”
펼쳐진 페이지는 공 만들기.

“와, 이거 엄마 어릴 때 많이 만들었던 거야. 이리 와 봐. 같이 해보자.”
아이가 바싹 다가앉아 엄마가 마법사로 변신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만만하게 색종이를 받아들었는데, 이리 접고 저리 접을수록 종이는 구깃구깃해져 갔다.
“엄마… 이래서야 도저히 공이 될 수 없겠다.”
울상이 된 아이 앞에서 내 손은 더 당황한다. 얼추 모양이 될 것 같아, 아이의 울음이 더 번지기 전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자, 여기 작은 구멍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이제 공이 될 거야! 같이 해볼까? 후~! ”
제대로 틀을 못 잡은 채 힘껏 불어넣은 바람은 종이를 터뜨렸고, 공은커녕 구겨지다 못해 찢어진 종이만 남겨졌다. 아이가 울음이라도 터뜨릴까, 민망함과 미안함이 섞인 눈으로 쳐다보니, 아이도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엄마, 근데 되게 못한다. 진짜야. 엉망진창이야.”
둘은 까르르 웃고 말았다.

우리는 새로운 종이를 꺼내들었다. 맞닿아야 할 곳은 서로 꼭 맞닿게 여미고, 접어야 할 곳은 꼭꼭 눌러 단단히 다져가며, 시간을 들여 접어갔다. 그리고 튼튼하게 완성된 종이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너무 큰 바람도, 너무 작은 바람도 아닌 딱 공만큼의 바람을 후~. 납작했던 종이는 순식간에 폭하니 부풀어 올랐다. 접착제 없이도, 서로 정확하고 견고하게 맞물린 한 장의 색종이, 그리고 그 안에 딱 맞게 불어넣어진 바람이 작은 공으로 완성되었다. 아이는 까르르 좋아하며 공을 가지고 달려갔다.
작은 종이공 하나 만드는 데에도 나름의 시간과 절묘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였다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힘주어 바람을 불어넣을 때 엉망으로 터져버려 이도저도 아니게 된 일들. 어쩌면 삶이라는 공에 불어넣는 바람이란, 내가 바라는 것들로서의 바람(wish)인지도 모른다. 잘 접힌 종이와 같은 삶을 세상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그 안에 불어 넣어진 바람, 소망이다. 그 바람은 삶의 방향성이 되어주기도 하고, 움직이게 하는 추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견고하게 다져지지 않은 삶에 거칠게 불어 넣어진 바람, 욕망은 삶을 이리저리 구겨놓고 찢어놓기도 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 욕망으로부터 온다’고 말했다. 물론 이 욕망은 탐욕과 집착이 아닌 비워지고 결여된 공간을 채우기 위한 욕망을 말한다. 비움을 향한 채움의 본능은 인간에게 방향과 움직임을 위한 선물인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소망하고 바라는 무언가를 위해서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 삶의 중요한 순간들이 맞닿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시간의 무게를 싣는다면, 견고해진 삶의 구조물 안에 불어 넣어진 우리의 바람이 형상을 지니고 즐거이 떠다닐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든, 일이든 무언가를 위해 시간을 들일 때는 정성을 다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그에 꼭 맞는 바람을 그 안에 가만히 후~ 하고 불어 넣어보기로 한다.

위서현
전 KBS아나운서.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 객원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만남의 힘>, <뜨거운 위로 한그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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