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문사회과학상 수상한 박재상·임미선 박사

근곡 박동완은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전 생애에 걸쳐 독립운동가, 기독교 언론인, 교육목회자로서 여러 사역을 감당하였다. 민족의 암흑기에 개화, 독립과 민주의 물결을 몰고 온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합으로 생긴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역사에 묻혀있다 싶은 이 분을 손자 부부가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아 그 업적으로 상을 받은 이야기다. <편집자 주>

“누군가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북소리가 박자에 맞든 종잡을 수 없든 간에 자신의 귀에 들리는 북소리에 맞춰 걷도록 하라.”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이다. 지난해 11월 16일,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학술대회 때 한국인문사회과학상을 받은 박재상 선생님을 뵙자니, 오래전에 읽은 소로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들은 북소리는 무엇일까? 대체 어떤 북소리를 들었기에, 한국 사회에서 선망의 직업으로 자리 잡은 ‘의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목사로, 또 기독교 역사학자로 고군분투하는 삶에 내몰렸단 말인가?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임미선 공저, 정한책방)로 한국인문사회과학상을 받은 그를 만나 본다.

Q. 두 분 다 목사님(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이시라 함께 목회하기도 벅찰 텐데, 공동저술로 상까지 받으셨습니다.
A. 부끄럽습니다. 그저 제 존재의 뿌리를 더듬었을 뿐인데 명예로운 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부하는 아내를 만난 건 더없는 기쁨이고요.

Q. 의사와 목사,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A. 저희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굶기를 밥 먹듯 하셨어요. 제가 할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학교도 다니지 말래요. 목사라는 직분은 굶는 자리라고요. 당신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신학교에 가지 말라고 완강히 반대하셔서 아버지 뜻에 따라 의대를 갔지요.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다시 목사의 꿈을 키우게 되었고요.

Q. 아버지의 기억에는 가난과 고난을 새겨 넣었지만, 그래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을 할아버지로 두셔서 무척 자랑스러우시겠어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이 있다면 뭘까요?
A. 독립운동가를 아버지로 둔 아들의 기억과 할아버지로 둔 손자의 기억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셨어요. 반면에 저는 할아버지가 마냥 그리웠어요. 아마 미국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뿌리>를 보고 나서 더했던 것 같아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삶의 뿌리에 할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로 인해 저는 ‘꿈꾸는 소년’이 되었어요. 어린 시절 저에게는 세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할아버지의 유품인 성경을 가지는 것, 두 번째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는 것, 세 번째는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밝히는 것!

Q. 그 두 번째 꿈은 의사가 되고 나서 뒤늦게 이루셨군요.
A. 네. 말씀드렸다시피 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가 없어서요. 첫 번째 꿈과 관련해서는, 제가 어릴 때 작은아버지 집에 놀러 가서 우연히 할아버지의 성경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3·1운동으로 옥살이를 하실 때 보셨다는 일본어 신약성서였어요.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생각지도 않게 사촌 형이 할아버지의 그 성경책을 저에게 주었을 때의 감동이란!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할아버지의 행적을 더듬어야겠다는 생각에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가 논문을 쓰게 되었어요.
먼저 아내가 “민족대표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2017년 8월), 곧이어 제가 “민족대표 근곡 박동완의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2018년 2월).

Q. 제가 견문이 적은 탓에 근곡 박동완 목사님과 관련해서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자료가 많지 않아 고생하셨겠어요.
A.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느낌이었지요. 주로 연세대학교 국학자료실과 국사편찬위원회를 들락거리며 자료를 발굴했는데, 하나씩 찾을 때마다 할아버지에 관한 기억의 조각들이 짜 맞춰지는 기분이었어요. 심지어 할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직접 논문 지도를 하는 듯한 경이로운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Q. 근곡께서는 어떤 계기로 3·1운동 때 민족대표가 되셨을까요?
A. 근곡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포천시 신읍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복한 집안이어서 5세부터 독선생을 두고 유학 공부를 했다고 해요. 12세에 포천의 명문가 출신 현미리암과 결혼함으로써,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과 동서지간이 된 것도 흥미로운 점이고요. 나중에 서울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는데, 배재학당 고등부에서 수학하며 자연스레 기독교를 수용하고 대학부에서 계속 공부했습니다. 이후 정동제일교회 본처전도사(Local Preacher)로 일하는 한편, ‘기독신보’에 입사해 주필 겸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중 자발적으로 3·1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요, 당시 정동제일교회 이필주 담임목사도 민족대표로 활약하신 것을 보면, 근곡의 행보는 운명이다 싶기도 합니다.

Q. 그 일로 옥고를 치르셨겠군요. 출소 후 상황이 궁금합니다.
A.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하다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소했어요. 고문으로 인한 흉터가 얼굴뿐만 아니라 몸 여기저기 남아있을 정도로 후유증이 심했대요. 그런 와중에도 YMCA나 조선물산장려회 흥업구락부 신간회 등에서 활동했는데,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감시가 극심했던가 봅니다. 때마침 1928년에 하와이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에서 담임목사 제안이 들어오자 홀로 망명길에 오른 데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Q. 해방이 되면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생각에 가족을 남겨두고 가셨군요.
A. 네. 하지만 1941년 2월 23일에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셨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잃지 않으셨어요. 이념성향이 다른 동지회와 국민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며 동포사회의 단합을 촉구하셨던 것도 신간회 활동에 이어져 있는 셈이지요.

박동완의 호 ‘근곡’(槿谷)은 ‘삼천리 방방곡곡 무궁화’를 뜻한다.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은 말이다. 그에게 기독교는 개인의 출세나 영달 따위와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그의 장손 박재상 박사와 장손부 임미선 박사에게 전해진 유산은 그것 아니었을까. 그들이 들은 북소리는 공공(公共)의 가치에 헌신하라는 하늘의 부름이 아니었을까. 3·1운동 백 돌이 새삼 무겁다.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이며, 기독교인문교양 계간지 <이제 여기 그 너머> 편집인으로, 세상의 다채로운 풍경에 신학 사유를 덧입혀 재미있게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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