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마루야마 겐지가 소설 <파랑새의 밤>에서 “현대인은 타인의 불행에 굶주려있다”고 한 말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인간은 결국 자기편이다’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는 함께 있어도 혼자인 시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는 ‘빈 칸’만 남아 있다는 사실은 참 슬픈 일입니다. 자신은 ‘늘 혼자’라는 극단적 외로움에 시달릴 때, 약간의 해갈을 위한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첫째 제안 - 외로울 때 자신을 바라보던 시야를 돌려 자신과 같이 외로움에 아파하는 그 사람의 ‘곁’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타인의 외로움을 감쌀 때 예기치 않게 자신의 외로움까지 치유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마치 영화 ‘패치 아담스’에서, 삶에 실패하여 정신병원을 스스로 찾아간 주인공 헌터 아담스가 환우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가운데 그들로부터 상처를 감싸주는 ‘반창고’라는 의미인 ‘패치(Patch)’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점차 자신도 치유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해주는 것이 치유 받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질병’은 ‘마할라’(מָחֲלָה)입니다. ‘마할라’의 뜻은 ‘밖으로 나가 원(圓)을 그리며 춤추다’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질병은 아프다는 이유로 집안에 혼자 누워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으로 나와 벗들과 함께 춤을 추는 생동(生動)으로 부딪혀야 치유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외로울 때는 자신이 먼저 다른 외로운 자의 곁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럴 때 ‘함께’ 치유됩니다. 작은 나무들이 서로 모며 ‘숲’을 이룰 때 ‘바람’을 이기듯 말입니다.

둘째 제안 - 외로움에 지쳐 삶의 위기를 맞이할 때 그 외로움을 함께 나눌 벗을 찾아야 합니다.
무게와 상관없이 모든 짐은 무거운 법입니다. 비를 맞은 양들은 즉시 말리지 않으면 젖은 양털의 무게로 인해 양들의 발목이 위골(違骨)됩니다. 그까짓 빗물쯤이야 할 지 몰라도 양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 혼자라고 느끼는 그 ‘외로움의 무게’를 속히 덜어내지 않으면 삶도 ‘위골’됩니다. 이럴 때는 자신의 짐을 함께 나눌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홀로’ 기도하는 모세의 팔이 내려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수세에 몰리자, 그 팔을 붙잡아준 아론과 훌을 닮은 그런 벗을 찾아야 합니다(출애굽기 17:8-12).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월든>에서 “나의 집에는 의자가 ‘세 개’ 있는데 하나는 친구를 위해, 하나는 가족을 위해, 나머지 하나는 고독을 위해서다”라고 말합니다. 이 11월에 그대 곁의 외로운 벗님들을 위해 의자 하나 마련하며 ‘잠시 쉬어가라’고 말해주면 어떨까요? 그러면 그 벗은 분명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참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미소 지을 것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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