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좋은 글을 편식하지 않고 만나는 방법

임수식_책가도061_Hand Stitch with Pigment Ink on Hanji_145cm×197cm_2010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 도서관에 간 적이 있는데, 명사들이 기증한 책들을 따로 보관하는 서가를 보고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옛 책가도(冊架圖)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임수식 작가의 작품처럼 어떤 책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에 따라 그 주인의 취향과 성품, 그리고 직업, 심지어 한 사람의 인생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책이라는 게 굳이 읽지 않더라도 블록처럼 가지고 놀거나 낮잠을 잘 때 베개처럼 사용해도 충분히 긍정적인 아우라를 뿜어낸다고 믿는 유형이다.
책을 보면 책을 소유한 사람의 정체성이 마치 초상화를 보는 듯 그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좋은 글, 좋은 책을 편식하지 않고 찾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달라는 쉽지 않은 숙제가 주어졌다.

우선 ‘좋은’이라는 정의부터 명확히 해야겠다. ‘좋은’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일단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의 인공지능은 내가 공감할 만한 혹은 내 취향에 들어맞는 내용을 끊임없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유하면서 나의 편견을 점점 더 ‘강화’해 버린다. 따라서 앞으로의 좋은 글이나 좋은 책은 단순히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좋은 글을 읽고도, 같은 책을 읽고도 깨달음이란 것은 대체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한 사람이 잘하면 세 번의 인생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은 나 자신을 통해서, 그 다음은 자녀를 통해서,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손자손녀를 통해 인생을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자랄 때는 전혀 살갑지 않았던 아버지가 손자들에게는 사뭇 세밀한 자상함을 보이는 것도 어쩌면 세 번째 인생만큼은 결코 허투루 살게 하지 않겠다는 아버지 몸속 ‘자기 복제자들’의 굳은 다짐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에서 ‘편식하지 않고 좋은 책을 찾아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읽는 책들을 함께 읽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어릴 때는 그림책을 펼치고 책이란 게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기도 하는 거라는 걸, 반대로 그림도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읽기도 하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초등학생 아이가 글자 책은 멀리하고 학습만화에만 푹 빠져 있으면 <드래곤 볼>과 <슬램덩크>에 빠져있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만화책을 다시금 손에 쥐어본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알폰스 도데의 <별>,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등을 필독도서로 읽어봤다는 말을 건네면 황순원의 <소나기>,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등을 추천하며 내가 그 나이 무렵에 읽었던 글들을 다시 아이와 함께 읽는다. 같은 책이지만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고, 전에는 읽지 못했던 것도 읽어낼 수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는 <완득이>, <아몬드> 등과 같은 책들도 아이와 서로 돌려가며 읽어야 한다. 이쯤 되면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교에 진학하여 또 어떤 책을 읽을지 궁금해지고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세 번의 삶을 다시 사는 사람의 책장은 어떤 모습일까? 나이를 가늠할 수도 없고, 직업을 추측할 수도 없고, 취향을 파악할 수도 없는 책장이려나? 과연 편견보다는 공감을, 공감보다는 깨달음에 이른 자의 아우라를 풍길 것인가? 책들을 가나다 순서나 장르별로 구분하지 않고 일곱 가지 무지개 색깔로 배열하고픈 나의 엉뚱한 꿈에는 분명 더 가까워질 것 같다.

P.S. 반드시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주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 그 자체가 좋은 글과 좋은 책을 편식 없이 찾아내며, 내 삶의 지경을 넓히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해법이라는 사실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사람들이 책을 ‘즐겁게’ 만날 수 있도록 본지에 ‘삶과 책 잇기’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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