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야곱의 고백> 펴낸 이상기 목사

이민목회 현장이 점점 어렵다고 합니다. LA평강교회 역시 40여 년의 세월 동안 그 어려운 광야를 여러 번 들락거렸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그 이민교회 현장에서 훈훈한 감동 이야기가 가득 들려옵니다. 그 감사이야기 중심에 있는 이상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40년을 목회해도 여전히 새롭게 깨닫고 배우고 있습니다. 아니 전보다 더욱 진하게 배웁니다. 목회현장에 임재해 계시는 주님이 느껴질 때 은혜가 임하는 걸 피부로 절절하게 느끼니까요. 새로운 예배당으로 옮겨 와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듯 목회하는 기분입니다.
모든 교우들이 예배당 뜰에 감사의 나무를 심고, 그 나무들을 돌보면서 힐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가 너무나 놀라워서 감히 무어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LA평강교회 이상기 목사는 요즘, 특별한 소회가 ‘감사감격’이다. 35년동안 영적보금자리였던 옛 예배당을 벗고, 새 예배당으로 들어온 지 6개월. 마치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추진해 온 것처럼, 엄청나고 꿈같은 일들이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가듯, 평강교회 상황에 딱 맞게 주신 손길에 그저 감탄과 감격으로 옷깃을 여밀 뿐이란다.

건물 없는 교회 배려, 한 지붕 네 교회
심각하게 계획한 적도 고민하지도 않았는데, 옛 건물을 매각하고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하는 모든 과정이 마치 세밀하게 계획하고 추진한 것처럼 순조로웠다. 그러면서 이 귀한 선물을 받은 교회와 여기에 있는 영혼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닫게 되었단다. 수없이 많은 흔들림과 상처들로 아팠고 힘겨웠지만, 평강교회는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로 더욱 성숙해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생명을 살려주신 은혜로 헌신한 목회자의 초심”을 잊지 않는 목회자의 변함없는 기도가 있었다. 특별한 은사가 없어도 좋으니,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목회를 하게 해달라는 간구였다.
목회자와 함께 LA평강교회 교우들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건물을 마련하지 못하는 한인교회들과 배려해야 할 소수민족 교회까지, 시간대를 나누어 4개 교회가 같은 예배당을 사용한다. 오전 11시부터 오후시간까지. 이런 제도를 좋다 나쁘다 따지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고 함께 섬긴다. 교회 건물(공간)을 가지고 소유욕을 부리는 모습을 여기서 찾아볼 수가 없다.

강단 위에서 신을 벗는 목사
이 목사는 남다른 습관이 하나 있다. 강단 위에서 말씀을 전할 때면 어김없이 신을 벗는다. ‘그분이 계신다’는 느낌 때문이란다.
“목회 초년병일 때는 생각지 못했어요. 30년 전 시내 산 순례 중에 감동이 와서 개인적인 의식 하나를 만들었어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음직한 한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며 신을 벗게 하시던 그 음성이 제 귀에 들리는 듯했어요. 광야를 밟고 다니느라 땅의 온갖 세속의 세월들이 묻었을 그 신을 벗을 때 모세가 느꼈을 감정이 제게도 느껴지는 것 같은 거지요.”

그때 세상 먼지 풀럭거리는 마음의 먼지들을 털어버리는 심정으로 강단 위에서 신을 벗는 의식을 갖게 되었단다. 무엇보다 죽음의 강을 건너오게 하시지 않았는가.
누구보다 간절하게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감사했다. 그의 세월은 야곱이 고백한 것처럼, 험악하기 짝이 없던 시간들.

불치의 질병 때문에 건너온 미국땅
이 목사는, 50년 전에 그에게 찾아왔던 불치병으로 죽음에 이르는 좌절과 고통으로 숨막히던 시절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상황으로라면 그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맞다. ‘재생불량성빈혈’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려 절망에 빠져 몸부림치던 고등학교 3학년 이상기 군.
의학적으로는 ‘치료불능’이라는 전제 아래, 매일 병원을 드나들며 수혈을 받아야 했고, 실낱같은 희망도 없이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동안 그 불치병을 해결하는 의학적 처방이 나온 것도 아닌데, 이유도 모르게 건강을 찾았고, 그 은혜에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다. 어렵사리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개척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40여 년을 목회하는 LA평강교회가 바로 그 교회다.

“창조주가 있다면 내게 보여주시오!”
그는 1951년 한국전쟁 중에 태어나 목숨을 지키고자 전쟁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하기 그지없던 시절, 거기다 불치병까지 앓고 있었으니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오히려 사치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더 이상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나만 없어지면 된다’ 생각하고 여러 번 자살을 기도했다. 어느 날, 저수지에 빠질 생각으로 신을 벗고 서서 마지막으로 조물주에게 항변했던 그 기억을 영화보다 더 선명하게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정말 창조주가 있다면 내게 보여주시오!’ 절규하듯 소리쳤다.
“신을 벗고 내 목숨을 짊어진 채 저수지 안으로 뛰어들려고 나아갈 때였어요. 그때 거세게 내 손목을 붙잡고 저수지로 향하는 제 걸음을 멈추게 한 다급하고 엄청난 음성이 있었어요. 그 소리가 바로, 모세를 불러 신을 벗게 하시던 하나님의 목소리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거예요. 제 인생에서 가장 낮은 자리였고, 거기서 저는 그분을 만난 셈이지요.”

J일보 [생명 캠페인]의 주인공
“고3 학생 이상기 군을 살립시다.”
그 시간은 1972년 2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J일보는 이날 “100만 명에 1명꼴의 희귀병을 앓는 어느 고교생의 투병”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재생불량성빈혈에 걸려 매일 수혈로 연명하는 고3 학생 이상기 군의 투병 이야기에 나라가 꿈틀거렸다. 이 기사는 그해를 달군 가장 따뜻한 미담으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그때 대한민국은 마치 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름 모르는 학생들부터 대통령 부인에 이르기까지 다들 ‘이상기’라는 한 생명이 살아나기를 기도했죠. 그 힘으로 저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셈이죠.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의 인생은 덤’이라고 말했어요. 목사가 되어 나 아닌 타인을 위해 살고자 한 것도 그런 감사에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이 목사의 가슴 속에 있는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은 ‘J일보’의 김천수 기자이다.
소년을 살리고자 하는 기자정신이 “우리 사회에 온정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이 이야기를 기사화 한 것이다.

삶의 향기 짙은 <야곱의 고백> 출간
이렇게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치열하게 산 그의 시간은 고단했지만 그 안에서 감사와 신비의 맥박이 전달되어온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지금은 오히려 향기 짙고 색상 붉은 장미처럼 고귀해 보인다. 목회자의 자세가 흐트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아홉 나이에 불치병 환자였던 자신의 모습을 자주 기억하곤 한다. 이상기 목사의 불꽃같은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 <야곱의 고백>(아름다운동행 펴냄)은 이런 까닭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다가가 삶의 불꽃이 되어줄 만한 깊은 울림이 있다.

박에스더 기자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