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여니 지난 가을에 떠났던 ‘10월의 서늘바람’이 다시 돌아와 귀밑을 스친다. 상큼한 마음에 시인 황인숙의 <강>을 읊는다. 이 시(詩)의 부분 발췌를 해본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처음 이 시를 읽고 느꼈던 첫 감정은 ‘이게 뭐지? 참 냉정하네’라는 당혹감이었다. 그러나 곧 누군가 쏟아내는 그 어떤 탄원도 듣지 않겠다는 시인의 선언이 옳았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하소연하는 것이 ‘잠깐의 해갈(解渴)’은 될지언정 그 고통의 ‘깔끔한 해결(解決)’은 될 수 없다. 곁의 사람들 모두가 그대의 말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은 아니며, 때로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도 아무 일 없는 듯 살 수 있는 냉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소연을 들은 후 위로와 격려의 반응보다는 돌아서서 폄하하는 비열함도 쉽게 상상된다. 그러니 말하고도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해한 강(江)은 그런 몹쓸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들려준 말이 ‘필요 없는 말’이면 흘러내려 보내고, 그 말이 ‘필요한 말’이면 하구(河口)에 곱게 담아 보관해둔다. 따라서 고통을 사람이 아닌 차라리 ‘강’에게 말하는 것이 깔끔하다는 것이다.
더 탁월한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마 있을 듯하다. 고통을 ‘사람’에게도, ‘강(江)’에게도 말하지 말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드리면 어떨까? 그것은 말하는 그대나 듣는 그분에게 서로 상처가 없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아가는 배고플 때 엄마 젖을 깨문다. 깨물어야 아가의 배고픔이 엄마에게 강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늘을 깨무는 행위’이다. 곧 자신의 절박한 현실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들으시라고 이를 악물고 깨무는 몸부림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기도보다 절실한 대화가 어디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언어’에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왕들, 곧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가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말씀드림으로 ‘늪 속’을 나와 ‘반석 위’에 우뚝 선다.
하지만 이 시대는 기도가 폐쇄된 시대이다. 가끔 듣게 되는 기도도 차라리 ‘주문(呪文)’에 가깝다. 이 가을엔 ‘하늘을 깨무는 소리’가 곳곳에 울리기 소망한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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