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길이 있다지만, 내게는 길 위에 책이 있다. 어두운 열정과 방황으로 숨가빴던 20대, 거미줄처럼 확고히 나를 얽어맨 사람들 속에서 목이 말랐던 30대, 그리고 영문모를 상실감에 조바심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길 위에서 많은 책들과 만났다. 삶의 이정표인양 길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책들.

자아의 한계에 갇혀 방황할 때 만났던 책들은 내 정신의 알집을 키워주었다. 기대하고, 열광하고, 실망하고, 흐뭇해하고, 되돌아보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까뮈, 니체, 야스퍼스, 성 어거스틴, 카잔차키스, 마르께스, 쿤데라,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토마스 머튼, 십자가의 성 요한… 내가 걸어온 삶의 길 위에서 뚜렷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던 이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본다.

책읽기는 일종의 치료행위이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일상의 덫이 새삼스레 무겁게 느껴지고, 평온하던 일상에 권태와 허무의 물결이 밀려와 삶의 질서가 송두리째 무너지면, 나는 시를 읽는다. 쉽지는 않지만 마음을 집중해 시의 리듬에 호흡을 일치시키다 보면 어느 결에 치유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기도도 안되고, 영화도 보기 싫고, 사람을 만나기도 싫고, 그러면서도 사나와진 정신의 파도를 재울 길 없어 방황하다가 이상의 <권태>를 거푸 4번을 읽고 마음이 평온해진 적도 있다.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면서 마음으로 뜻을 새기다보면 어느 순간 괴로움이 돌연 극복되고 보다 높은 관점에서 생을 조망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기곤 했다.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로깡댕처럼 나도 세상의 모든 책을 읽고 싶었다. 사람들이 좋은 책이라고 언급하는 모든 책들을 읽으려는 가당찮은 욕망에 시달리기도 했다. 시간은 부족하고, 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았다. 고민 끝에 나는 읽을 책을 선정하고, 또 그 책을 읽는데 나름대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피로써 쓰이지 않은 책은 읽지 말 것. 그 책이 피로 쓰였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디면서 오히려 더욱 찬연한 빛을 발하는지 여부이다. 그래서 나는 소위 베스트셀러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밀려왔다가 포말만 남기고 사라지는 파도처럼 덧없이 사라질 책에 열광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두리번거리듯 읽지 말 것. 책읽기를 통해 처세에 필요한 지식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양이 목표라면 잡다한 독서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정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꼼꼼한 독서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나는 믿을만한 저자들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는다. 그런 독서를 통해 그 저자의 관점에 눈뜨게 되고, 관점의 이해는 인식지평의 확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셋째, 이해하기 쉬운 책을 읽었으면 다음에는 가급적 이해하기 어려운 책에 도전할 것. 책읽기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마음의 긴장을 풀 수 있다는 점이다. 적당히 숨차면서도 우리 육체를 한계에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산행이 우리 영혼을 환기시켜주듯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우리 영혼을 상쾌하게 해주는 책이 있다. 그러나 그런 책에만 맛들이다 보면 우리 정신의 힘이 자라지 않을 수도 있다. 육체를 인내력의 한계에까지 밀어붙이는 가파른 산에 도전해야 비로소 우리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듯이, 우리 이해력과 지성의 한계를 절감할 책을 읽어야 우리 정신의 힘은 자라난다. 그런 책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지만 그 절망의 심연에서 만나는 기쁨은 그 모든 불편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넷째, 읽은 책은 반드시 메모를 할 것. 책을 읽고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그 책은 망각의 심연에 잠겨버리고 만다. 나는 책을 읽고 공감했던 구절들을 메모장에 옮겨놓고 가끔 그것을 뒤적이곤 한다. 퇴계 이황 선생은 “낮에 읽은 것은 반드시 밤에 사색하라”고 했다. 사색으로 이어지지 않는 독서는 절반의 독서에 불과하다.

얼마 전 조선조의 유학자였던 서애 류성룡 선생을 기념하여 세운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찾았다.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에 이르는 6.5킬로미터 거리를 나는 짙은 안개 속에서 걸었다. 왼쪽으로 낙동강을 끼고 반원형으로 나있는 그 호젓한 길을 홀로 걸으며 위대한 정신의 스승을 만나러 그 길을 걸었을 수많은 학인(學人)들의 심정과 하나가 되었다. 지난밤에 읽었던 퇴계 선생과 류성룡 선생의 대화를 떠올리며 '옛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걸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데 안개에 갇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지 않았던 낙동강이 서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자태를 드러냈다. 장관이었다. 얼핏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내 길벗이었던 책을 이정표 삼아 더듬듯 진리의 길을 걸어가면 정녕 내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햇살처럼 찬란한 그분의 얼굴을 뵐 수 있을까?’

김기석
청파교회 담임목사. 문학적 깊이와 삶의 열정을 겸비한 목회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그는 시, 문학, 동서고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진지한 글쓰기와 빼어난 문장력으로 신앙의 새로운 층들을 열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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