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슬퍼서 참 오래 울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울음 이후에 작은 평화가 밀려왔습니다. 김현승 시인은 ‘슬픔’이란 시에서 “슬픔이 나를 목욕시킨다 / 슬픔 안에 있을 때 나는 바르다”라는 맑은 시어를 들려줍니다. 시인은 이미 슬픔과 눈물이 단순한 액체가 아닌 삶을 세척(洗滌)하고 영혼을 세정(洗淨)하는 신비임을 체득했습니다.
‘참 슬픔’이 제조한 ‘참 눈물’만이 영혼을 씻겨 줍니다. 이 대지(大地)가 기근으로 신음하는 것은 단지 비가 오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향한 참회와 타인을 향한 긍휼이 말라 눈물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봄도 ‘시간’이 아닌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 만들듯, 대지의 평화도 정치인들만이 아닌 이 대지의 화해를 갈망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눈물은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그것은 ‘애통(哀痛)’과 ‘원통(冤痛)’입니다. 물론 이외에 분통과 비통도 있지만 이것들은 사실상 원통과 유사한 감정입니다. 애통이 ‘영혼이 아플 때 흘리는 눈물’이라면 원통은 ‘불이익을 당해 억울할 때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런 까닭에 애통은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만 원통은 그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습니다. 그 결과 애통은 자신을 정화시키는 선한 결과를 낳지만 원통은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는 갈등을 남깁니다. 이런 이유로 원통은 ‘눈물의 자격’을 갖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눈물까지도 위조(僞造)가 가능한 시대입니다. 이런 사람은 ‘눈으로는 울고 가슴으로는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행위는 눈물에 대한 모독일지 모릅니다. 사울왕은 자신이 죽이려던 다윗에게 오히려 두 번씩이나 목숨을 구제 받습니다. 골리앗에게서 구출해준 것까지 말하면 세 번씩이나 은택을 입은 것입니다. 그때마다 사울은 눈물을 흘리며 다윗에게 사과합니다. 그러나 그때뿐입니다. 이후 사울은 다윗을 살해하기 위해 다시 추적합니다. 이 사울의 모습에서 값싼 회개에 만족하는 이 시대 일부 그리스도인의 초라한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시인 신철규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에 실린 시 ‘눈물의 중력’에서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오비디우스도 “눈물은 때로 말보다 훨씬 무겁다”라고 알려줍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어쩜 표피적 위로를 던져주는 값싼 웃음보다 커다란 어깨가 들썩일 만큼 흐느끼는 ‘참 슬픔’일지 모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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