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공헌책방에서 배울 수 있는 생태 감수성은?

2호선 잠실나루역 1번 출구로 나와 왼쪽을 쳐다보면 용도를 알기 어려운 단층의 긴 회색 건물이 보인다. 얼핏 보면 창고 같기도 한데 가까이 다가가면 통유리 사이로 보이는 내부가 심상치 않다. 아치형의 책장에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고 어림잡아 봐도 몇 만권은 거뜬히 넘을 것 같은 그 형태가. 도서관? 서점? 그도 아니면 복합문화공간?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이곳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공공헌책방 ‘서울책보고’(www.seoulbookbogo.kr). 지난 3월 27일 개관해 5개월가량이 지난 이 공간은 새로운 형태의 헌책방을 추구하고 있었다. 책벌레를 형상화한 서가에 가득 들어찬 책은 모두 청계천거리 및 서울 곳곳에 있는 헌책방과 서울 근교에 있는 29개 헌책방에서 보내온 책들이다.

헌 책이 새로운 플랫폼을 만났을 때
헌책방에서 헌책을 사는 풍경은 이전 세대들이 책을 향유하던 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편리한 교통, 카페와 식당가와의 인접성, 거대한 규모의 책 보유량과 화려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도심의 대형서점에서 사람들은 책 문화를 누린다.
무엇보다 온라인에서 훨씬 편리하고 빠르게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시대에 무엇 하러 발품 팔아 조금 싸게 헌책을 사러 돌아다니겠는가. 청계천 헌책방이 이전과 같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시대의 흐름일 것이다.

물론 민간 온라인 서점이 운영하는 잘 정리된 중고서점도 있어 ‘중고’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책값은 신간 할인율이 적용된 가격보다 조금 싼 편.
그런 와중에 공공헌책방이라고? 과연 이곳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그런데 이 헌책방은 어느새 서울시의 핫플레이스 중 한 곳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에 적힌 방문기와 SNS의 해시태그 수만 봐도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알 수 있는데,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방문객들이 이 공간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저 똑같이 기존 헌책방처럼 헌책을 팔고 있을 뿐인데도,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찾지 않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사진을 찍어 방문리뷰를 남기고 SNS에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두 손 가득 헌책을 구입하고 있는 풍경이 조금 낯설다. 같은 헌책이어도 이를 담아내는 플랫폼이 새로워졌기 때문일까?
비주얼을 중요시하고 분위기를 통해 좋고 나쁨을 결정짓는 새로운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르게 ‘헌책’ 자체를 즐기기보다 그 헌책이 있는 공간의 세련됨, 사진에 어울리는 서가의 자태에 이끌려 헌책의 매력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그야말로 옛 것이 새 것을 만나 환상적 콜라보를 이뤄 레트로 감성과 가장 힙한 문화 감성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

유류 공간과 오래된 책이 재생되다
이곳이 원래 창고로 쓰던 유휴공간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저 그런 공간으로 버려져있던 공간이 책이 있는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되살아난 것. 그것도 새 책이 아닌 헌책으로. 그리고 그 헌책은 역시 쇠락해가던 오래된 헌책방에서 보내준 책들이다. 창고는 책을 팔고 문화공연과 강연이 이뤄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새 옷을 입었고, 헌책은 옛 거리에서 전혀 다른 동네의 새 플랫폼으로 옮겨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헌책들은 청계천에 있었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새 책 주인을 만나 책만이 주는 지성과 감성을 다시 건네는 중이다.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고 여겼던 유휴공간과 헌책이 만나 뿜어내는 새로운 활기는 특별하다. 서울이라는 오래된 도시가 간직한 기억, 이전 세대가 품었던 문화 감수성이 새 플랫폼에서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고 있다. 그러기에 헌 것이 되었다고 무조건 버릴 것이 아니라 창의적 방식으로 되살렸을 때 얻게 되는 아름다운 단면을 이 공공헌책방에서 발견한다. 내 삶에서, 우리 사회에서 재생시켜야 할 오래된 것들은 무엇인지, 헌책방에 들러 새로운 영감을 얻어 볼 수 있겠다.

박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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