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 이덕무>, 이덕무 지음, 정민 옮기고 씀, 민음사, 2019년, 268쪽, 15000원

“제주도에 신혼살림을 차리겠다고요?”
미술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선생님이 결혼하고 제주도에 살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극구 말렸다. 나랑 호흡도 잘 맞고, 성격도 좋은 선생님이 제주도로 이사를 가면 미술관은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호기롭게 “미술관이 김포공항이랑 가깝고 요즘 저가항공은 요금도 비싸지 않으니까 프로그램 일정에 맞추어 올라와서 며칠 동안은 시댁이나 친정에 머물며 일할게요” 하고 덧붙였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1시간이 넘도록 제주도에 살면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다들 한 달만이라도 살고 싶은 핫한 제주도인 건 알겠는데요, 아무 연고도 없이 제주도에서 사는 것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에요.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일을 한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을 거구요. 처음 얼마간은 신나고 재밌겠지만 일단 아기가 생기고 나면 병원도 오가야 하고 옆에서 도와줄 가족도 간절할 텐데 그걸 모두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요?”

기왕 내려간 제주도, 도심에서 살면 서울에 사는 거랑 뭐가 다르겠냐며 한적한 시골에서 예쁘게 살림집을 가꾸며 살겠다고 말했을 때는 “그런 곳에서 살다가 아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게다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되면 학업 때문에라도 계속 외떨어져서 살기는 어려워요” 했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선생님이 고집을 꺾지 않자 급기야 이런 말까지 하고 말았다.
“그런 데서 자장면이나 피자 배달이라도 시키려면 멀리 마중을 나가서 받아 와야 할 거예요.”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아니나 다를까 제주도에서 살던 선생님은 아기가 생기자 전격적으로 시댁 근처 일산으로 이사했다. 거봐라, 내가 그렇게까지 말렸는데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에는 내가 말한 그대로 되지 않았느냐, 하고 의기양양해져야 마땅할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내가 이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선생님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롭게 깨달은 쪽은 오히려 나였기 때문이다. 선생님 남편은 시골 동네에서 치킨 장사를 하고, 선생님은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내가 일하는 미술관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남는 시간에는 제주도에 산적한 오름 주변을 하나하나 산책하고, 제주 도민만 안다는 한적한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짧은 시간을 살다가 돌아왔건만 선생님은 마치 길고 긴 행복한 신혼여행을 즐긴 것처럼도 보였다. 산다는 게 간혹 위태로워 보여도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고나 할까. 어쩌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을 필요한 만큼 할 줄 알고, 스킨스쿠버 자격증도 있고, 주얼리 세공 기술도 있으며, 심지어 양궁 선수도 1년간 했다는, 양파처럼 까도 까도 연이어 등장하는 선생님의 맥락 없는 다양한 경험치는 바로 이런 식의 무모함과 시행착오의 소산이었던 모양이다.
반면에 나는 당장의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며 하고 싶은 것이나 혹은 해야만 하는 것을 뒤로 미룬 적은 얼마나 많았을까.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옳지 못하다는 것도 빤히 알면서 세상살이 원래 그런 거라며 타협한 모습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는 벌써 고리타분한 꼰대가 되어 버린 것일까?

요즘 사무실 책상 한쪽에 <열여덟 살 이덕무>를 올려놓고 틈날 때마다 260년 전 조선 청년의 잠언을 한 편씩 읽고 있다. 메모광이었던 이덕무가 좋은 글귀와 만나면 그때마다 옮겨 적고 스쳐 지나가는 단상을 적어 놓은 것들이다. 열여덟 살에 품었던 이덕무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짠해지고 따듯해지는 이덕무. 보통 이맘때가 유치하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열여덟 살 때의 마음이 생을 통틀어 가장 순수하고 곧고 바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여덟 이덕무의 마음을 읽으면 내가 이덕무가 된 듯하고 열여덟이 된 듯하다. 동시에 허투루 보낸 나의 세월과 정신이 아깝게 느껴지지만 이제 와서 뒤를 바라볼 겨를은 없다. 열여덟 젊은 마음으로 앞을 보고 살아야 할 뿐이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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