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자신을 높은 곳에 세워줄 ‘원군(援軍)’으로 선택한 두 개의 금속은 바로 ‘황금’과 ‘무기’입니다. 단테가 <신곡> ‘지옥편’ 제7곡에서 “황금은 피로에 지친 모든 영혼에게 한 순간의 휴식도 주지 못 한다”고 알려주지만,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등정하기 위한 이 시대의 ‘황금 사랑’은 위험수위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지금 시대가 인종차별보다 신분차별을 더 심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귀족과 평민이라는 선천적 신분차별을 받았으나 지금은 ‘직위의 높낮이’라는 후천적 신분차별이 냉혹하게 작동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분상승을 위한 치열한 다툼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람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음해, 이간질 같은 잘못된 편법이 교묘하게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잃어버리고도 승리를 얻는 ‘불편한 축포(祝砲)’를 쏘게 됩니다.

문득 ‘항아리 안의 거미들’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개미나 나비 같은 곤충들을 항아리에 넣으면 반드시 뚜껑을 닫아야 하는데, 거미들을 항아리에 넣을 땐 굳이 뚜껑을 닫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 까닭은 한 거미가 항아리 밖으로 나가려 움직이면 다른 거미들이 서로 그 발을 물고 늘어져 아래로 떨어트린다는 것입니다. 하여 ‘항아리 안의 거미들’은 다른 사람에 해(害)를 가하다가 자신도 해를 입는 어리석은 이기심의 표현으로 비유됩니다.

고대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는 “교만과 질투와 탐욕은 마음을 불태우는 세 개의 불씨”라고 말합니다. 이 세 불씨가 어울리면 그곳은 강력한 화염으로 전소(全燒)됩니다. 문제는 이 세 불씨가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자에게서 유독 발견되는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반칙 없이 높은 곳에 도달한 사람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타인보다 우월한 지위에 올라 ‘자기 과시’를 하는데 있다면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오르면 교만과 질투와 탐욕으로 그 자리를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8곡에는, 뱃사공 ‘플레기아스의 배’를 타고 지옥의 강 스틱스를 건너는 순간이 나옵니다. 단테는 지옥의 강인 스틱스가 물이 아닌 ‘거대한 늪’으로 채워져 있는 것과 이 늪에 갇혀 무언가를 먹고 있는 피렌체 출신의 ‘필리포 아르젠티’를 보게 됩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온갖 비열한 악을 저지르고, 그렇게 취득한 부정한 권력으로 약한 자의 물질을 수탈한 자였습니다. 그 결과 스틱스 강의 진흙을 먹는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는 잘못된 야심이 자칫 ‘가장 낮은 곳’에 던져지게 할 위험인 것을 단테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제자들이 했던 “누가 크냐”(누가복음 9:46)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사실 ‘누가 크냐?’라는 질문에 관심을 갖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무너집니다. 이 질문은 ‘서열 매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5월의 봄을 붉게 물들이는 장미보다 아름다운 것은 ‘높은 곳에 대접받는 ‘장(張)’이 되기보다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종(從)’이 되기를 기도드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