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꼴라쥬>, 이기진 지음, 디자인하우스, 2018년, 228쪽

재개발 공사로 지난 해 사라졌지만 내가 일하는 미술관 50미터 정도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모양의 보름산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평지에 소복하게 솟아 있는 보름산이 오래전 위대한 권력자의 무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경주의 신라 시대 고분처럼 말이다. 본격적으로 아파트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실제로 보름산 바로 근처 땅에서 매장 물건들이 나와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현장에 몇 번 가보았는데 일반인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줄이 둘러쳐진지라 정확히 어떤 것들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은 아이들의 숲 놀이터가 된 미술관 큰 바위 앞에는 동네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다는 제단 돌이 놓여 있다. 행여 부정이라도 탈까봐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덕에 온전히 남겨졌다.
그러고 보니 보름산으로 이어지는 동네 옛길 초입에도 마을의 수호신 같은 나무가 버티고 서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허름한 집 수십 채 정도, 그리고 논이나 밭 같은 거 말고는 별 거 없던 오래된 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서며 새로운 도시가 생긴다고 생각했는데 켜켜이 쌓였던 흙이 뒤집어지며 뻘건 속내를 드러내자 여기에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 삶의 기억이 여럿 남겨졌음을 보게 되었다.

도심 외곽 변두리 마을 사정이 이러할 진대, 한성 혹은 한양 등으로 불리며 2천년 이어온 서울이라는 공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삶의 시간이 축적되어 있을까? 한 사람의 인생조차도 다사다난(多事多難)하다고 말하는데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간 서울을 질서 있게 정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종이, 인쇄물, 사진 따위를 오려 붙이고, 일부에 가필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을 ‘콜라주’라고 말하는데, 서울이라는 공간은 콜라주 기법으로 덕지덕지 가늠하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방법이다. 2NE1 씨엘의 아빠이면서, 물리학자이고, 그림책 작가이자, 만물 수집가이기도 한 ‘딴짓 고수’인 저자 이기진이 쓴 <서울 꼴라쥬>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서울은 멋진 곳도 아니다. 정리된 것 같지만 정리가 안 되어 있고, 비례가 맞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고, 디테일이 부족하고, 조화롭지도 않다. 제각각이다.
서울의 예측할 수 없는 도시계획도 어찌 보면 매력이다. 꾸준히 계획을 세워 서울을 조성했다면 지금의 서울은 없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책임지지 않을 것 같은 책임자들’에 의해 서울은 계획되고 만들어지고 또 단절된다.
서울의 또 다른 매력은 없애서는 안 될 멋진 풍경을 없애는 과감함에 있다. 그냥 놔두면 될 일을 과감히 없애고, 그런 다음 없어진 것을 어렵게 다시 찾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런 과정이 창의적 발상이고 작업이다. 쉽게 버리고 어렵게 다시 찾는 과정 속에 망가져가는 것인지, 아니면 발전해가는 것인지 헷갈리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 이 또한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서울만의 매력 아닐까?”

도대체가 서울을 욕하는 말인지 칭찬하는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작가는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서울의 흔적을 오롯이 찾아 모은다. 고릿적 인감도장, 녹슨 세탁소 다라미, ‘그립감’ 좋은 빗자루, 낡은 행주 등을 사들이고, 을지로 3가 뒤편, 보광동 골목길, 남산 산책길 등을 내밀하게 눈에 담는다. 이뿐인가? 중국집 번개 배달부에게 시선을 빼앗기며, 이가 나간 막걸리 잔, ‘스뎅’ 밥공기, 공사장 철근 불판 등으로 탐식하고, 코쟁이들은 절대로 모를 홍시 맛을 음미하면서 회고적인지 현재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서울을 이어 붙인다.

얼마 전에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아파트 분양 광고에 ‘보름산을 품어 자연을 닮은’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갔고, 심지어 이 지역 아파트 단지 건설을 알리는 신문 기사의 참고 지도에도 떡하니 ‘보름산’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었다. 이미 사라져 예전 동네 사람들이나 부르던 보름산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공식화된 아이러니. 다들 보름산미술관이 자리한 산자락을 당연히 보름산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겼다고 해야 할까? 손에 잡히는 실물이 아니더라도 이름이나 기억으로, 시간과 공간을 통하는 뭔가를 말이다. 크고 위대한 흔적도 중요하지만 작고 대수롭지 않은 흔적도 분명 소중하다. 그래서 쉴 새 없이 한 층 한 층 올라오는 아파트의 빠른 속도만큼이나 보름산에 대한 뭔가 하나라도 남기고 싶은 나의 마음도 더 급해졌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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