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나를 안아주다

나는 종종 딸과 함께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본 후 함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작년 추석연휴 때 딸과 단둘이 심야영화로 본 ‘서치’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딸의 실종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딸과 영화의 반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 번 가족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다. 아내의 죽음 이후 이에 대해 밖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알기에 역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온라인에서 만난 얼굴 모르는 친구에게 애착을 느끼는 딸을 보면서 과연 나는 내 딸과 진솔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통해 그동안 듣지 못했던 딸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용기를 내어 딸에게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서치’를 보면, 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미숙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영화 속 한 장면이 뇌리에서 계속 맴도는데 그 영상은 ‘김치검보(김치청국장)’라는 음식을 하는 아내의 동영상이다. 이 장면은 나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정서를 떠오르게 해주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실 나는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이 장면을 통해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 했던, 내면의 죽음에 대해 두려워했던 마음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영화의 한 장면이 무의식의 내면에 들어가는 촉진제가 된 셈이다.
내가 경험한 것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요즘 시대에서는 영화와 같은 미디어 영상을 통해서 평소에 말하기 힘들었던 문제들을 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이 현재 힘들어하고 있는 문제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많은 상담자들은 상담 장면에서 영상을 사용하는 것이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 이상의 활동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영상을 이용한 치료와 상담은 ‘영화치료’(Cinema-therapy)로 불리며, 그 과정과 효과에 대해 많은 실증적인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나는 미국의 동료들과 함께 아동·청소년들의 자아존중감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 영화를 활용하여 영화의 치료적 효과를 확인하였다. 우울증, 사회공포증, 과잉행동장애 등의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총 17명의 아동·청소년들이 연구에 참여하였는데, 치료를 위해 ‘팻 알버트(Fat Albert, Cosby & Zwick, 2004)’라는 영화를 선택하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도리스(Doris)는 자신을 무가치하게 생각하여 친구를 만드는 것도 힘들고, 같이 운동을 즐기지도 못하는 등 전혀 사회생활을 해나가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도리스가 팻 알버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긍정적인 경험을 하면서 변화하고 달라져간다. 놀라운 것은 연구결과 영화를 보여준 실험집단에 속했던 아이들의 자아존중감 수준이 영화를 보지 않은 아동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음이 확인되었다. 결국 ‘팻 알버트’라는 영화 한 편을 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가 영화 ‘서치’를 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딸에게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용기를 낸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경험하고 자신을 돌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영화가 우리 모두에게 가져다주는 의미 있는 선물이며 효과이다.
영화를 본 후, 영화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영화의 이 장면이 왜 나에게 인상적이었는지, 그리고 기억에 계속 맴도는 장면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가족,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영화를 함께 나누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지금까지 용기내지 못했던 감정들을 일깨워주며 이를 통해 우리의 행동과 일상을 바꾸고 변화시켜 줄 것이다.

최근에는 단순히 영상을 시청하는 것을 넘어서서 영상을 사용하여 자신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는 흥미로운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만약에 당신의 삶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든다면 영화제목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영상 만들기 상담활동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영상은 이제 우리 가까이에 와있는 효과적인 도구이다. 자신이 직접 영상을 제작하여 보여주는 유투버라는 새로운 직업을 볼 때, 미디어 시대를 맞이하여 모든 영역에서의 영상 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시대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영상이 아니라 나의 내면과 정신건강을 좀 더 풍요롭고 성숙하게 해줄 나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상 제작에 우리 모두 조금은 욕심을 내도 되지 않을까?

이상민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상담전공 교수로 현재 대학상담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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