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보면,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적을 계속 울려도 차가 움직이지 않자 가까이 가보니 운전자가 “갑자기 앞이 안 보여요. 하얀 우유 속을 걷는 것 같아요”라며 울부짖습니다. 이후 이 현상이 곳곳에 전염되면서 도시 전체가 시력을 잃은 사람들로 넘치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됩니다.
정부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낡은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합니다. 이제 이 도시는 ‘볼 수 있는 자’와 ‘볼 수 없는 자’로 나눠지고 ‘볼 수 있는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를 벌레 대하듯 학대합니다. 또한 시력을 잃은 자들끼리도 식량을 좀 더 확보하기 위해 싸움을 벌입니다.
다행히 첫 환자를 진료했던 의사가 감염되어 이곳에 수용될 때, 아직 시력을 잃지 않은 아내가 ‘눈먼 체’하고 이곳에 들어와 눈먼 사람들의 ‘눈’ 역할을 해줍니다. 얼마 후 시력을 잃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시력을 찾게 되고 이제는 의사의 아내가 시력을 잃게 됩니다. 그녀에게 사람들은 ‘두렵지 않냐?’고 묻습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어 있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고 사는 것이 곧 눈 먼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닌 ‘보지 않는 자’가 소경입니다. 따라서 소경의 정의는 수정되어야 합니다. 타인의 불행에 눈감은 자, 곁에 있는 사람의 허물을 찾기에는 ‘독수리의 눈’이 되지만 자신의 허물에는 ‘두더지 눈’처럼 어두운 자, 이런 사람들도 소경의 범주에 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명(失明)은 육신의 시력을 잃은 ‘흑색실명(黑色失明)’과 무지하여 분별력이 없는 ‘백색실명(白色失明)’으로 구분되어야 하며, 그 후자인 ‘백색실명’이 더 치명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가 거듭나던 순간은 이제껏 황금과 권력 외에 그 어떤 것도 보지 않던 그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여리고의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을 포착하고 자기 재산의 반(半)을 헌사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중턱 입구에 강도를 만나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못 본체 피해 갔던 누가복음 10장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분명 ‘눈이 먼 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날’은 오늘이 지나 당도할 ‘내일’을 말함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이웃의 고통과 아픔이 ‘자기 눈’에 발견되는 순간입니다. 오랜 독서로 눈이 침침해질 때마다 문득 ‘나도 백색실명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대 눈은 지금 무사하신지요? 감히 묻습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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