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랫길에 만난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었고, 한 사람은 교통사고로 전신의 감각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살 소망을 잃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어 숱한 나날 신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한 분 한 분을 찾아가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시련을 견디며 지나온 그분들은 도리어 천국의 꽃이 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향기에 이끌리어 저도 모르게 여쭙고 말았습니다.
“만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분들의 대답은 동일했습니다.
“아니요.”
분명, 제가 모르는 세계였습니다.
고난이란 무엇일까요? 조창화 목사님의 표현대로 ‘천만 번 무너짐이 천상의 노래가 될 것이다’일까요? 언어유희 같이 ‘아름다움의 어원이 앓음다음’일까요? 낮고 작고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 ‘감히’라 싶을 용기로 노래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영국 격언이 있지요. 지나온 시절을 돌아보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감격들이 제 마음속에 고여 있음을 봅니다. 그 감격들을 노트에 옮겨보며 가락을 붙이고 기타를 튕기며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사랑은 낮은 곳에 고여 있었네
아름다움은 작은 것 속에 깃들어 있었네
천국은 가난함 속에 피어 있었네
나의 구원은 그 속에서 자라가고 있었네
사랑은 천국의 풍경인가
세상은 영혼의 학교인가
상처는 영혼의 물감인가
인생은 영혼의 추억인가
추억은 영혼의 꽃잎인가
그리움은 추억의 향기인가
엎어져도 사랑 속인 이 세계는
하늘의 눈물이 꽃피운 정원인가

새봄을 맞으며 일기처럼 썼던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우리는 사랑 속에서 아름다움에게 무참히 당하는 존재’ 무얼 더 바랄까, 왜 더 바랄까 싶은 하나님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언제나처럼 저의 노랫길은 누구를 위로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들, 펼쳐진 풍경들, 부어진 은혜들로 인해 하나님은 저를 당신의 자녀로 자라가게 하심을 눈치채게 됩니다. 헌신과 충성의 길과 더불어 향유와 축제의 누림을 가지게 하십니다. 서러운 시절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얼굴을 하늘로 향했던 한 친구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세상엔 마이너스가 없다.’
모든 걸 잃었음에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던 두 분의 영혼 속 세계는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까요? 세상이 줄 수도, 세상이 알 수도 없다는 평안. ‘샬롬’이라는 단어 속에는 ‘태평’(완전한 평화)이 들어있다지요. 우리들의 잃음이, ‘잃음’이 목적이 아니라 ‘궁극이 채워지는 어떤 신비로운 얻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젠가 어느 예배당에 고요히 앉아 하나님을 생각할 때, 제게 들려주셨던 그분의 음성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낼 때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 아니? 사랑의 추억 많이 안고 오너라.”

사랑의 추억. 아마도 우리 영혼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 아닐까요. 오늘도 저는 노래하러 갑니다. ‘위로’는 위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나는 길 떠난 편지
향기로운 꽃바람에 꿈을 싣고
맑은 시내와 푸른 숲을 지나
내 님이 보내신 그곳 가려네
<길 떠난 편지 / 좋은날풍경>


박보영
찬양사역자. ‘좋은날풍경’이란 노래마당을 펼치고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라도 기꺼이 여는 그의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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