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비교적 가깝다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임에도, 완독한 장편 소설은 펄 벅의 <대지>가 유일하지 싶습니다. 사춘기의 호기심이 충천하던 때에 지방 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게, 1938년 노벨 문학상을 탄 펄 벅 여사가 중국 농촌을 배경으로 쓴 그 소설이 무척이나 마음을 사로잡았었지요. 하도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이라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억해내기는 쉽지 않지만, 농촌의 순박한 전원생활의 엘레강스를 만끽하기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덕분인지, 대학시절에는 방학 때마다 농촌봉사활동을 많이 다녔습니다.
펄 벅 여사가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는데, 아마도 선교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사역하는 중국과 인접한 나라, 한국의 정겨운 풍경과 선교활동의 아름다움도 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펄 벅이 1960년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펄 벅이 만난 한국의 농심
경상도 지역을 다니다가 경주 근처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해질 무렵 소 한마리가 이끄는 달구지에 타작한 볏단을 묶어 싣고는 고삐를 잡은 농부 역시 지게에 같은 볏단을 가득 메고 길을 재촉합니다. 그 광경을 본 펄 벅은 서양 문명인의 기질을 발휘하여 물었답니다.
“지게에 실은 볏단을 몽땅 달구지에 포개어 싣고 농부 자신도 달구지에 타고 가면 일석이조일 텐데, 왜 힘들게 지게에 볏단을 따로 지고 가십니까?”
그 농부 왈, “소가 하루 종일 진을 빼고 논밭에서 일했는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짐을 나누어져 소에게 작은 농심을 배려할 겸 그리하노라”고.
속칭 현대 문명인인 펄 벅은 편리한 이득과 유리함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생각하며 살다가 순박한 농심(農心), ‘편리’나 ‘이득’이나 ‘유리’를 따지지 않고, 자기의 농사를 돕는 소 한 마리에게도 순박하게 베푸는 ‘배려’의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공생할 줄 아는 사람들
감동은 또 이어집니다.
시골 마당에 감나무들이 많고 아낙네들이 긴 장대로 익은 감을 다 따고는 나무마다 꼭대기에 몇 개씩은 꼭 남겨 놓았더래요. 따기 힘들어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아뇨, 그건 겨울나기 새들을 위해 남겨놓은 까치밥이지요” 하더랍니다. 물주고 거름 주지도 않았는데 하늘 아버지가 바람과 햇볕과 물로 자양분 삼아 감이 열리게 했으니, 감사하여 공중 나는 새에게도 베풀어야 하겠다는 갸륵한 마음일 뿐입니다.
펄 벅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얼른 생각이 닿았겠죠. 구약성경에도 밭에서 추수한 다음 이삭은 주어서 가져가지 말고, 외지인이나 가난한 자들의 몫으로 두라고 되어 있으니까요. 이웃과의 공생, 아니 겨울새들과도 공생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사는 곳, 펄 벅은 그때 순박한 한국의 농촌, 농부의 마음을 만난 겁니다.

배려의 동인은 감사
사실 펄 벅 여사가 한국 방문에서 접한 이 같은 감동의 이야기는, 1962년 뉴욕에 돌아가서 기자회견에서 쏟아놓은 내용입니다. 그 분은 소설 <대지>를 통해 수많은 독자들에게 농촌의 따뜻한 인간애의 감동을 주었는데, 정작 본인은 한국의 농부와 소달구지, 아낙네와 까치밥, 이 두 세상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은 겁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복을 받으려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것이 감사하여 감사의 표시로 되돌려줄 뿐입니다. 배려의 동인(動因)은 감사입니다. 감사 없는 배려가 있다면 그것은 선거에서 표를 얻으려는 정치적 바리새인의 겉치레일 것입니다. 감사해서 베푸는 배려는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유리와 불리를 따지지도 않습니다. 받는 자의 신분도 묻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소도 좋고 까치라도 좋은 겁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만물의 영장으로 지으시고 키우신 사람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골치가 아픈가요, 마음이 아픈가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많이 지니고 존경도 받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골치’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현장을 피해갔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를 모르면 누구나 배려하려 할 때 골치가 아픕니다. 유·불리를 따지게 되니까요.
사마리아 사람은 비록 사회적으로 따돌림 받는 신분이었지만, 일용할 양식 주심에 감사하여 선을 베풀었습니다. 배려해야 할 상황을 만났을 때, 감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슴이 아파’ 오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골치가 아파’ 옵니다.
감사는 “왜?”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감사에 “아멘”으로 응답할 뿐입니다. 아멘은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아멘은 배려이고, 가슴의 언어입니다. 배려의 공동체, ‘아멘 공동체’가 그립습니다. 그 곳에 아름다움이 있고, 웃음이 꽃피어나고, 행복이 감도니까요.

박종화
경동교회 원로목사.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과 국민문화재단 이사장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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