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정리의 힘

숙련된 목수(木手)는 목공 작업을 다 마친 후 반드시 작업 중에 바닥에 쌓인 톱밥을 남김없이 깨끗이 제거합니다. 톱밥이 인화(引火)에 약하기에 혹시 있을지 모를 화재를 방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숙련된 목수는 반드시 미리 준비해둔 목장갑을 착용합니다. 녹슨 못에 찔려 평균 치사율 65%의 파상풍에 걸릴까봐 대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숙련된 목수는 작업 전에는 이미 ‘정리’해둔 목장갑을 착용하고, 작업 후에는 바닥의 톱밥을 ‘정리’하여 후환(後患)을 제거합니다.

분주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작가 미하엘 엔테의 소설 <모모>를 보면, 현재의 시간을 저당 잡힌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를 살면서도 늘 ‘바쁘게’ 삽니다. 꽃을 볼 여유도, 시를 읽을 시간조차 내지 못한 채 그저 바쁘게만 삽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소설 속 사람들처럼 참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이 ‘바쁨’의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주해서 바쁜 것’이고, 어떤 사람은 ‘부지런하여 바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전자(前者)인 ‘분주함에서 오는 바쁨’입니다. 사실 분주함이란 ‘일에 대한 세밀한 계획’과 ‘시간사용에 대한 정교한 분배’가 되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곧 ‘삶의 정리’에 실패한 사람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삶에도 ‘정리’가 필요하다
한자어 ‘정리(整理)’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를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의 핵심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무질서’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2~5)라는 질서의 세계로 ‘정리’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도 ‘정리’가 필요합니다. 삶도 가지런히 정돈될 때 더욱 찬란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정리는 세 가지 부분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시간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상처로 얼룩진 과거’를 말합니다. 사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정리하지 못하면 그 과거가 ‘현재’까지 집어 삼키는 못된 폭력을 가합니다.
빌레몬서를 보면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선한 주인 빌레몬의 곁에서 무단으로 도망친 노예입니다. 더구나 도망칠 때 빌레몬의 재산에 해를 끼쳤습니다. 그런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옥중 바울을 만나 회심합니다. 교회사에 의하면 오네시모가 이후 에베소교회의 장로가 되어 회중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약 오네시모가 추악했던 자신의 과거에 수감되어 자신을 학대하였다면 그의 삶은 흑암으로 점철된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정리’하고 새 삶을 선택한 오네시모를 바울은 “그가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유익한 자”(빌레몬서 1:11) 라고 증언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야바 법정 뜰에서 세 번이나 모른다 했던 베드로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초라한 과거와 단호히 결별하는 ‘시간의 정리’를 선택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마태복음 26:75). 바울 역시 젊은 날에 예수의 복음에 대해 오해로 인해 스데반의 죽음에 관여했고 이후 교회공동체 척결을 위해 질주했던 그 슬픈 과거와 결별하였기에, 기원후 66년 로마 오스티안 광장에 순교할 때까지 기쁨으로 복음을 위한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디모데후서 1:7).
셰익스피어의의 “과거는 그대 삶의 서론일 뿐이다”라는 말을 기억하며 아픈 과거가 오늘을 사는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관계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관계란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물론 이 말을 ‘사람을 차별하여 사귀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히브리인들은 서로의 비밀과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훗헴’이라고 불렀으며, 모든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선한 품성을 지닌 사람을 ‘멘쉬’라고 일컬으며 존중했습니다. 그 까닭은 ‘훗헴’이나 ‘멘쉬’를 곁에 두면, 자신의 영혼이 암흑을 헤맬 때 그들이 빛으로 이끌어주며, 절망에 신음할 때 희망을 제공해줄 ‘하늘사람’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뱀의 혀’와 ‘여우의 몸짓’으로 사람의 심성을 타락시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악의 문화로부터 자신의 순수를 지키려면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 극도의 신중함이 요구됩니다. 남유다 제 4대왕 여호사밧은 분명 선한 왕이었으나, 그가 자신의 아들 여호람을 바알을 숭배하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 사이의 딸 아달랴와 정략결혼을 시키자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와 교제한 여호사밧’을 크게 책망합니다(역대하 19:1~2). 복의 근원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기 위해 아브라함도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은 것은 자신이 75년간 관계를 맺어오던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관계정리’였습니다(창세기 12:1).

셋째는 ‘생각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사색가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에게는 신의 은총이 아니고는 치유될 수 없는 세 가지 오류가 있다. 그것은 권태와 변덕과 불안이다”라고 말합니다. 왕이 되기 위해 국왕 던컨을 살해한 맥베스의 불안, 딸의 변덕에 유린당해 황야에서 울부짖던 리어왕, 그리고 삶의 권태에 빠져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후 해변에서 유희를 즐기는 <이방인> 속의 뫼르소의 모습은 곧 이 시대 현대인의 실상일 것입니다. 다윗이 싫었고 두려웠던 사울왕 역시 그를 살해하기 위해 군사 삼천을 동원하여 추격합니다(사무엘상 26:1~3).
따라서 ‘생각의 정리’란 이런 권태, 변덕, 불안의 마음을 덜어내는 결단을 말합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생각의 게으름보다 더 큰 악은 없다”라는 말도 공감하지만 불필요한 생각을 짐처럼 어깨에 이고 사는 삶도 경계해야 합니다. ‘정리’와 가장 가까운 어휘가 ‘절제’이기 때문입니다.

정리, 지금 시작해도 결코 빠르지 않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릿결, 가지런히 정돈된 옷장은 유쾌함을 선사해줍니다. 그러나 그 반대일 경우 참으로 당혹함을 갖게 됩니다. 얼마 전 새 옷을 샀는데 실밥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있어 잠시 당황했습니다. 그 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부분에서 실밥이 다 풀려 결국 옷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끔하게 정리하지 않고 출고된 옷, 그리고 훼손된 부분을 ‘그때’ 바로 정리하지 못한 저의 실수가 만든 작은 에피소드입니다.
삶의 질서와 품격을 제공해주는 정리, 비록 쉬운 일은 아니지만 회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시도해야 합니다. 지금 시작해도 결코 빠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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