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날, 기미년 3월 1일
100년 전 그때는, ‘왜인’(倭人)에게 나라를 빼앗겨 모든 것이 왜인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던 때였다. 한말 이후 열기를 더해오던 교육 운동도 한 풀 꺾였다. 마음대로 학교도 세울 수 없었고 마음대로 가르치고 배울 수도 없었다. 왜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라를 강탈한 왜인이 나라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빼앗긴 나라 사람은 종의 자리에 놓였다.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나날이 어두워 겨레 모두가 괴로움과 아픔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원통한 처지를 탄식만 하지 않았다. 어두움을 뚫고 겨레가 분연히 일어났다. ‘독립선언서’를 읽고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 높여 외쳤다. ‘기미년 3월 1일’의 ‘봉기’였다.

독립을 외친 그날의 고함소리는 온 강토로 퍼져나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만세 운동은 서울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집회에서 끝나지 않았다. 동시다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한 날에 머물지 않고 몇 달 동안 잇달아 일어났다. 어린 학생과 어른 할 것 없이 목이 터져라 독립 만세를 불렀다. 겨레의 함성은 남녀노소와 지역의 장벽을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기미년 만세 운동은 왜인에 의한 살상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비폭력 평화 정신을 지키고자 했다.

어떻게 3·1만세운동이 가능했나?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는가? 기미년 독립 운동은 별안간에 들이닥친 갑작스런 일이 아닐뿐더러 무질서한 무리의 만세 시위가 아니었다. 왜인의 강탈에 대한 저항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당연한 역사의 이치였다. 야금야금 나라를 빼앗고자 간교하고 악랄한 술책을 부려온 일본이 마침내 나라를 강제로 자기 손아귀에 넣어 강탈을 일삼자, 벌써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사력을 기르고자 했으며, 겨레의 생각을 깨우쳐 힘을 기르자고 했고 국제간의 교섭을 통해 독립을 이루자고도 했다.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앞서 윌슨 미국대통령이 민족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놓자 우리 겨레도 이에 고무되기 시작했다. 우선 나라 바깥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이 솟구쳐 나왔다. 기미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나라 안도 분주해졌다. 온 나라 사람이 두루 힘을 모아 같은 날에 만세 운동을 벌이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 방방곡곡에 발판을 둔 조직 세력을 규합하여 가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독교와 천도교가 하나로 뭉쳤다.

비폭력·평화주의 겨레운동
이 두 세력은 비폭력 평화주의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지배층에 맞서 무력 항쟁을 벌인 갑오년 농민 항쟁의 하부 조직이었던 동학은 이름을 ‘천도교’로 바꾼 다음, 포교와 교육으로 운동 방향을 돌려 전국 곳곳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기독교 또한 독립협회 운동에서 비롯된 만민공동회에 적극 참여했던 이전의 운동 공간이 막힌 다음부터, 전도와 교육 운동에 있는 힘을 다 쏟아 세차게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1910년대에 이르러 전국 규모의 조직망을 갖춘 사회 세력은 기독교와 천도교 밖에 다른 것이 없었다. 오늘날의 말로 바꾸면, 기독교와 천도교는 당시 가장 튼튼한 조직 기반을 가진 시민 사회 세력이었다. 기독교 쪽 16인, 천도교 쪽 15인, 불교 쪽 2인의 민족 대표가 이를 반영하였다. 3·1운동은 이 조직 세력을 등에 업고 일어난 겨레 운동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민주공화국’
3·1운동은 조선왕실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되지 않았고 조선 왕국의 복원을 겨냥하지 않았다. 선각자들은 벌써부터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와 공화정에 눈을 뜨고 이를 귀히 여겼던 터라 이들이 꿈꾼 독립된 나라는 민주공화국이었다. ‘3·1독립 선언서’가 나라 안팎을 향하여 표명하고 있듯이, 쟁취코자 한 독립된 나라의 사람 곧 ‘우리’는 “자주민”이었고 “인류 평등”의 큰 뜻을 지켜야 했다.
이 운동에 힘입어 사방에 흩어져 있던 독립 운동 단체가 하나로 뭉쳐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한다”고 헌법 앞머리에 명시했다. 왕에게 복종하는 ‘신민’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자주민’이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다. ‘왜인의 패망’은 ‘우리의 해방’이었다. 이날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는 유엔의 감시 밑에서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행사할 수 있는 선거권을 누렸다. 선출된 대표들은 뜻을 모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3·1운동의 뜻을 이은 임시정부의 헌법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3·1운동은 지나간 어느 시대의 사건 아니다
민주공화국은 민주공화국에 어울리는 도덕 바탕을 필요로 한다. 왕이 내리는 일방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던 부자유한 생활 방식과 편벽된 삶의 지향성을 떨쳐내고,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을 받쳐주는 공공 미덕이 터 잡고 있어야 한다.
‘자주민’은 이 공공 미덕의 실행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마구 날뛰는 비속한 삶의 행태를 억제하고, 이웃이 겪는 불의와 불공평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는 좁다란 자기 본위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는 삶의 미덕 위에 터하지 않으면 민주공화국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3·1운동은 지나간 어느 시대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이민족에 의한 강탈 행위의 종결로 완성되지 않는 깊은 저항 정신을 뿜고 있다. 그 정신은 민주공화국의 자주민다움을 책임 있게 구현해가는 공공의 품격을 멈춤 없이 지키고 높이기를 요청한다. 이 품격이 도전받고 훼손될 때면 자주민은 단호히 떨쳐 일어나 저항해야 한다. 이것이 자주민다움이고, 시민다움이다.

시민다움-자기중심의 이기서 벗어나는 공공의 미덕 실행하는 것
그러므로 저항의 대상은 우리 바깥에만 있지 않다. 우리 안에도 굳게 진 치고도 있다. 민주공화국의 성패는 단순히 빵의 문제로 결판날 수 없다. 민주공화국은 그것보다 중요한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다.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체제의 부당함 때문에 멀리 중심에서 밀려난 변두리의 서러운 이웃에게 다가가 그 아픔에 동참하는 삶의 품격으로 공화국은 빛을 낸다. 공화국의 자주민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제도를 존중하나 그것을 ‘거룩한 절대’라고 떠받들지 않는다. ‘다수’ 속에 도사린 자기중심의 탐욕과 횡포도 보고, 다수에 의해 억압 받고 희생당하는 ‘소수’의 고통과 진실도 눈여겨보기 때문이다.
3·1운동 백돌을 기리게 된 오늘, 민주공화국의 자주민이 지녀야 할 공공의 시민 미덕은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하고 있다. 자기중심의 이기성에서 벗어나 이웃을 존중하는 공공의 미덕을 실행하는 ‘자주민다움’, 생각하는 사람은 이 시민다움을 실행하자고 외치며 앞장서 나가지 않겠는가.

박영신
사회학자. 평생 연세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명예교수로 녹색연합 상임대표를 지냈으며, 현재 (사)녹색교육센터 이사장, 재단법인 목민 이사장 등을 맡아 생명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고 후학들을 키우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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