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다케오교회 유화준 목사

현해인=현해탄(玄海灘)을 사이에 둔 한국인/일본인을 모두 품은 사람

한일관계에 진정한 봄을 만나기는 영원히 어려울까.
3·1 독립운동 100년, 경술국치 109주년…. 임진왜란부터 영토와 역사왜곡의 갈등이 있는 지금까지, 가까운 일본은 우리를 ‘호시탐탐’ 괴롭히고 아프게 해서, 가해자와 피해자처럼 늘 마음으로 얄미운 존재다. 2019년 지금도 군사적 외교적으로 긴장 상태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 될 때마다 일본 땅에 사는 한국인들의 노심초사가 얼마이겠는가.
이런 길고도 지난한 한일관계의 협곡 속에서, ‘현해인’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유화준 목사(사진)와의 조우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지난 연말, 일본여행길에서 만나 나눈 대화는 일본인에 대한 선입관과 정서적 감정(?)에 대해 어느 정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태생적 삶을 사는 일본 속 한국인
유화준. 외가 쪽으로 4대째 신앙의 뿌리가 이어져온 가문이고, 일본 규슈지방 사가현 다케오교회의 담임목사이다. 하지만 ‘목사’라는 호칭으로만 이해하기에 너무 광범위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칼럼니스트, 기자, 교수, 선교사, 통역사, 문화사역자 등 그에게 붙어있는 수식어는 참으로 많다. 한국대사관 근무를 비롯해서 다양한 직장도 덧붙여진다. 그만큼 그의 역할이 다양하다는 반증이다.
한일국교가 수립되기 전, 후쿠오카 초대영사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서 일곱 살까지 일본에서 살았고, 귀국하여 다닌 초등학교 6년 동안 어처구니없게도 ‘쪽바리’라고, ‘한국냄새가 안 난다’고 ‘왕따’가 되어, 차별과 배척의 아픔을 겪으며 다섯 번의 전학을 해야 했다.

오해와 편견 속에 당한 아픔
급기야는 초등학교 동급생에게 칼을 맞아(수유국민학교 시절, 지금도 몸에 그 흔적이 있다) 일곱 바늘을 꿰매는 대사건의 주인공이었고, 유소녀기에도 극도로 악화된 민족감정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혀지지 않고 기억의 공간 속에 빼곡히 들어있는 그 역사가 어느 날, 유화준에게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했다.
66년의 세월 동안, 13년의 한국생활을 제외하고 53년을 일본에서 공부하며 생활했지만 존재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다. 유화준을 보는 시각은 저마다 달랐다. 재일교포들은 본국사람으로, 한국에서는 재일교포로,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으로 대했다.
젊은 시절부터 유화준은 어디서나 뛰어났고 부지런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일본에서의 편견과 차별과 갈등은 없어지지 않았다. 겉으로는 의기양양했어도 내면에는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픈 욕구가 가득했다.
그래서 일본을 탈출할 방도로 영국유학을 생각했다.

유언처럼 주신 아버지의 한 가지 권면
“유학을 가려거든 우선, 1년 동안만 차분하게 네가 있는 땅 일본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가거라. 세계무대에 서려면 선입견을 버리고 편견 없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IQ 149로 천재적 잠재력을 가진 딸을 향해 아버지가 유언처럼 하신 말씀이었다.
영국 유학길을 앞두고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규슈지방 아리따 도자기마을로 2박3일 작별여행을 떠났다.

작별여행 길에 만난, 전혀 다른 세상
한데, 거기서 전혀 예상치 못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도공들이 둥지를 틀고 사는 곳, 거기서는 조선인 도공 ‘이삼평’을 신(神)으로 섬기고 있었고, 조선인 후예가 13대~15대를 이으며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정치 외교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일본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착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세계를 품고자 일본을 떠나기 직전, 인구 1만 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에서 큰 울림이 찾아왔다. 2박3일!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기자정신으로 취재하면 취재할수록, 풍습 정서 언어…. 모든 것이 한국의 것과 너무나 유사함을 발견하며 흥분하게 되었다. 유 목사는 한반도와 일본땅 사이에 놓인 바다가 분리되지 않은 육지 상태로 잇닿으면, 그 사이에 저 현해탄이 없었다면 어땠을까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깊숙이 빠져들었다.

도공들의 마을 아리따의 조선인들
4~5세기 전에 인구 4천 명 정도의 소도시 아리따에 조선인 도공 2000명이 갑자기 합류했으니, 거기가 일본 속의 조선땅이 되지 않았겠는가. 도자기 이야기만이 아니고, 일본에 기독교가 전래된 400년 동안 엄청난 순교의 피를 뿌렸다는 그 현장도 이 주변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교과서를 통해 배운 일본 외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한일 양국의 속살을 만나는 자리였다.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이 알게 되면, 정서적 한일관계에 변화가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자, 영국유학을 1년 연기했다. 그리고 아예 도공들의 마을 ‘아리따’로 짐을 싸들고 들어가 생활하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기록을 남기고자 일본 위성방송국에서 예산을 따서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일본어로 세 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동안의 여러 가지 이력이 사역에 큰 밑받침이 되었다.
현해인클럽, 한일문화교류의 센터 설립
‘알려는 용기, 알리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늘상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가르침에 힘입어, <알려는 용기, 알리는 노력>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한일문화교류센터를 설립했다. 역사강좌, 문화강좌, 요리강좌를 통해 한일교류의 장을 만들어갔다. 이것이 <현해인클럽>이다. ‘현해인’은 한일관계 극복의 키워드라고 그는 강조한다.
전쟁을 일으키고 일방적으로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간 전범자들 외에 평화를 원하는 보통사람들의 일본을 넓혀가고 싶은 것.
아리타에서 사역에 몰두하다보니 영국유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뜻을 같이 해준 일본인 청년과 결혼하여 마흔에 낳은 딸 유카가 5대째 신앙을 이으며 큐슈대학교 박사과정에서 한일관계 연구를 하고 있어서, 이들 부부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국적으로 구분하지만, 저는 한국과 일본을 합한 인구 2억을 품고 ‘현해인’으로 삽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현해탄의 다리가 되라고 유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독학으로, 일본기독교회의 목사가 되다
평신도로 섬기던 아리따교회가 어느 날 목사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 교회 노인들을 돌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독학으로 신학과정을 밟아 일본기독교회 소속 목사가 되었다.
그후에 할머니 세 분이 지키고 있는 지금의 다케오교회에 부임하여, 한일관계 개선의 장(場)으로 역할하고 있다.
유화준 목사의 고백이다.
“제가 계획하고 선택해서 사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이켜보니 하나님이 세밀하게 계획하시고 이끄셔서 우리 가정을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심을 두려운 마음으로 확인할 뿐입니다. 어떤 이유도 찾을 필요 없이, 이끄시는 대로 여기서 사역합니다.”

유화준의 어머니, 故정우천 선교사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던 1954년, 그때 유화준의 어머니는 신학을 마치고 교육전도사로 일을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헌신하고 끝까지 사역하지 못하는 빚진 마음이 있어, 뒤늦게 한국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고 60세에 최고령 일본선교사로 파송 받아 25년간, 85세까지 헌신했고, 92세에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그에게 엄마는 신앙의 멘토였고, 지킴이였고, 기둥이었다. 일본을 미워하지 않고, 어떻게 사랑하고 사귀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신 분이다. 어머니의 이런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이 소학교 시절 일본인 담임선생님이었다.
유화준의 어머니 정우천 선교사가 전해준 이야기 한 토막.
일제 강점기에 노골적으로 아픔을 겪어야 했던 때, 조선 아이들을 감싸주었던 일본인 여선생이 해방 후에 조선사람들의 보호를 받아 부두까지 무사히 가서, 무릎을 꿇고 조선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언젠가 너희들은 반드시 조국을 되찾을 거다. 한국말을 잊지 말고 공부해라. 조국을 되찾을 때 그때 크게 기여하는 사람들이 되거라. 일본은 그때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 선생님의 모습, 그 사랑의 마음을 기억하며 어머니는 어렵사리 일본선교에 헌신하신 거라고.

‘현해인’ 유화준 목사가 사역하는 법칙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면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한일관계의 냉엄한 현실 앞에서, 유화준 목사는 부모님에게 받은 유지와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현해인’으로 산다.
‘왜놈’, ‘조선놈’으로의 살얼음판을,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길로 다가서자고, 정치 역사 외교 정서적 이론 너머에 있는 길, 먼저 일본을 아는 것이 화해공존의 유일한 길이라고, 유화준 목사는 온 삶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너는 한국인이지만 일본인을 끝까지 사랑하라”는 부모님의 유언과, 용서와 화해의 길을 가르쳐주신 그리스도의 가르침, 이것이 유화준 목사가 걷는 길의 법칙이며 섬김의 도리이다.
(유화준 목사는 한국땅과 가장 가까운 일본 사가현에서 열심히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사랑과 화해를 증거하고 있다.)

일본=박에스더 기자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