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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말하기에 관하여
특집-말을 건네다
[228호] 2019년 01월 01일 (화) 박명철 @

‘독한 혀들’의 세계에서
오프닝 멘트부터 대놓고 ‘독한 혀들의 세계’라고 소개하던 시사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패널들의 멘트가 독할수록 더 빛났는데, 시청자들은 그런 독한 말들을 즐겼습니다. 독설이 오락의 한 수단이 된 셈이지요. 그러나 저는 사람이란 존재가 누군가의 독설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면전에서 쏘아붙이는 말을 ‘돌직구’라고 합니다. 네티즌들이 함께 만드는 사전 ‘위키피디어’에 의하면 이 말은 원래 야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삼성라이온즈의 오승환이란 투수가 경기를 3점 차 이상으로 이기고 있을 때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등판해 던지는 공이 바로 ‘돌직구’인데, 기교를 부리지 않고 마치 ‘칠 테면 한 번 쳐봐라’는 자세로 가운데 직구를 던져 넣었다고 합니다. 직구인데 공이 마치 돌처럼 묵직해서 방망이에 맞히기도 어렵고 맞아도 멀리 가지 않다보니 관중들은 그 선수가 등판하는 순간 환호하며 즐거워한 데서 유래된 말이지요.

최근에는 이 ‘돌직구’가 화법 용어로 사용됩니다.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면 상처받을까봐 가능하면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예의였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개념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돌직구에 욕설까지 얹어서 정치 이슈를 이야기하는 팟캐스트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부작용도 커서 그 방송을 즐겨 듣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욕설을 섞어서 사용하게 되고, 상스런 댓글 수준의 언어들이 상용됨으로써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 중에는 인터넷 댓글 때문에 상처 받아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난 들을 만한 이유가 있거나, 또한 공인이라는 범주에 넣는다 하더라도, 과연 독한 언어로 그들을 인격적으로 살해해도 괜찮은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이유’는 있게 마련이고, 그 이유를 충분히 말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당하는 비난 속에는 억울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중심 메시지가 있는 사랑이 담긴 돌직구가 아닌 누군가를 비난하고 상처 주는 표현만 따가지고 오는 가짜 돌직구의 말은 아예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가치 있고 중요한 신앙인의 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잘 알려진 어느 철학자는 대놓고 ‘힐링 무용론’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힐링’은 결국 ‘위로’나 다름없는데 달콤한 위로 한 마디로 어떻게 세상의 험한 벽을 넘을 수 있겠는가, 본질을 말하고 가르치지 않는 한 그런 힐링은 마약 같은 미봉책일 뿐이다, 상담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위로를 주려고 애쓰기보다 당장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대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가만히 들어보면 ‘아 그렇겠구나’ 싶으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불편했습니다. 저의 이런 불편한 마음을 정신과 의사인 김병수 선생이 설명해주더군요.

돌직구와 따뜻한 말 한마디, 무엇이 우리에게 더 중요할까요? 아니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맨 얼굴’을 보아야 하고 진짜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고 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아니 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민낯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내 모습은 내 의지로 형성된 것보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부분이 생각보다도 훨씬 큽니다. 더욱이 지금 내 모습은 수십 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인데 이것이 돌직구 한 방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약점이 무엇이고, 심리적 결핍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기 문제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 김병수 <버텨낼 권리> 중에서


그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용서할 것을 가르치고, 그러다가 사람은 끊임없이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니 당신이 십자가를 통해 그 일을 떠맡은 것인지 모릅니다.

귀할수록 귀한 그릇에 담는다
한 게시판을 읽다가 거기 쏟아져 나온 거친 표현들 때문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홈페이지 회원들이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게시판의 글은 한 지도자를 비판하는 글이었는데, 그야말로 언어로 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을 휘둘렀고 도저히 글로 옮기기도 어려운 욕설들로 댓글들을 이어나갔습니다.
물론 이분들의 주장은 나름 옳을 뿐 아니라 때로는 의미도 크지만 문제는 왜 그렇게 거칠고 막무가내인 말들로 포장했는지 어느새 본질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귀한 것일수록 감춰야 한다고 하죠. 귀한 것은 쉽게 때가 묻고, 쉽게 훼손되는 법이니까요. 귀한 것을 담아내는 ‘말의 그릇’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뜻하고 품위 있고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이야기가 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 앞에 세우고 벌어진 이야기, 그 이야기의 뒷부분을 주목해 봅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던 군중들이 사라진 뒤 여인만이 남았을 때 예수님이 묻지요.
“그들은 다들 어디로 갔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말아라.”
무엇보다 여인에게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하신 예수의 말씀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죄를 묻기보다 돌아가 회개할 것을 부탁하시는 그 말씀이 얼마나 따뜻한지요. 이 여인은 눈물 흘리며 마음으로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래, 다시는 죄를 짓지 말자.’ 어쩌면 여기까지가 타인이 개입할 수 있는 마지막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이 이 회개의 마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이고, 그래서 그 대화는 성공한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의 인생에 깊이 들어가야 할 소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우리는 독한 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고,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초청한다면, 우리부터 예수의 말씀을 지녀야 합니다. 이제 아파하는 이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네가 왜 그랬는지 알아. 이제 다시는 그러지마.”
“그때는 너도 몰라서, 어려서 그랬어.”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작가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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