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우리들의 '크리스마스'를 찾아서

축제, 설레고 아프고 기쁘고 감사했던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축제였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82년도까지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동방예의지국의 율법 아닌 율법이 공기처럼 자욱했던 세상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은, 닫히고 통제된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공간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물론이고 교회에 담을 쌓고 사는 이들조차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맞이하며 새해를 맞았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면 산에서 나무를 자르거나 캐서 예배당 앞에 성탄트리를 만듭니다. 집에서 솜을 가져와 붙이고 밤새 장식물을 만들어 붙인 뒤, 등을 달고, 연처럼 길게 늘어뜨린 종이에 ‘축 성탄’이라 써서 걸었죠. 교회당 앞에 성탄트리가 세워지면 비로소 우리의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됩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축하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아이들은 매일 밤 교회로 모여 연극을 준비하고, 합창을 연습합니다.
중고등부 때는 선물교환 시간이 있었죠. 남학생과 여학생의 수를 맞추고 남학생은 여학생에게, 여학생은 남학생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 추첨해서 선물을 건넸는데 선물 속엔 벌칙이 담겨 있어서 짓궂은 벌칙들로 여학생들을 괴롭혔던 기억이 나요. 어떤 아이는 선물상자에 죽은 쥐를 넣어 여학생을 울리고 연탄재를 부숴서 담아 놓기도 했죠. 남자아이 여자아이들이 밤을 새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던 유일한 밤이었어요, 크리스마스이브는.
통금이 해제된 길거리엔 사람들로 넘쳐나고 가게들도 환하게 불을 밝혔죠. 축제였어요. 그때 크리스마스는 모두가 기다리던 날이었죠. 바로 그날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었으니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미지는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이었던 것 같아요(이의용 교수, 국민대).

이렇듯 우리는 저마다의 크리스마스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몇 분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신의 크리스마스 추억을 들려주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응답해주었다. 문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먼 추억의 시간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12월이 되면 흑백영화처럼 떠오르는 아련한 그리움. 아홉 살 때쯤 우리 마을에도 십자가가 달린 교회당이 세워지고 뎅그렁뎅그렁 종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그 소녀가 치던 풍금소리는 새로운 세계였죠. 크리스마스 날, 난생 처음 용기를 내어 찾아간 교회에서 나는 소녀에게 수없이 고쳐 쓴 분홍빛 편지를 건넸습니다. 그 소녀는 아직도 내 편지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아내가 모르는 비밀(조희군 시인).

중학교 2학년 때의 성탄전야. 그날에도 새벽송을 다녔죠. 어린 마음에 산타의 기분으로 밤늦은 시간에도 일하는 분들을 기억하고자 순경 아저씨, 버스기사님과 안내양 누나들에게 성탄 선물을 전했습니다. 멋쩍은 인사와 함께 몇 개 안 남은 선물을 전하던 중 볼이 발갛게 언 안내양 누나가 “애쓰는구나, 참 고맙다”며 제 어깨를 포근히 안아주었습니다. 제가 오히려 위안을 얻은 새벽송의 기억, 그 누나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유시경 신부, 오사카 성공회성당).

20대 초반, 교회청년회 성탄절 행사에 들고 갈 카드와 선물을 포장하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죠. 보험회사에 다니는 엄마가 와야 집을 나설 수 있었는데 결국 깜깜해져서야 왔고, 나는 아마 울었던 것 같아요. 보험 계약이 있었다고 늦었기도 하고 기분도 나지 않아서 그날 교회를 가지 않았으며 처음으로 성탄절을 집에서 보낸 날이 되었지요. 그 쓸쓸함이라니. 그런데 성탄절에 엄마는 늘 혼자였다는 걸 알게 되며 그날 이후 나는 되도록이면 성탄절을 엄마와 같이 지내려고 노력하게 됐어요(정금교 목사, 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전 상임의장).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의 추억도 있고, 화이트크리스마스에 함께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 추억도 있었다.

시골 교회에서 성탄절 공연을 위해 노엘 찬양에 맞추어 발레를 했다. 발레복을 입고 천사날개를 하고 타이즈를 신고 발레 슈즈를 신어야 했다. 대학생 무용하는 언니가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발레복은 빌렸는데 슈즈가 맞지 않아 새로 사야 했다. 돈이 없어 며칠을 울고 연습이 끝난 텅 빈 예배당에 남아 두 손을 맞대어 기도손을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예수님 발레 슈즈를 갖고 싶어요.”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 머리맡에 놓인 발레 슈즈! 나의 첫 기도응답이었다. 무용하는 언니가 내 기도를 듣고는 도시까지 나가 새로 구해온 슈즈였다. 성탄의 밤, 나는 새 슈즈를 신고 노엘노엘 날아올랐다(이은영 동시작가).


모처럼 찾아온 화이트크리스마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집에 모였다. 화려한 장식이나 반짝이는 불빛은 없었다. 소박한 식탁에 소박한 선물을 나누었다. 오시는 주님을 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서였을까. 창밖에 내리는 흰 눈이 저마다의 마음에도 소복이 쌓여서였을까. 그날 밤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우며 행복했다. 함께 모인 그들은 마치 예수님처럼 귀한 손님들이었다(유미호 센터장,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무엇보다 주님 오신 그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들, 그러니까 구원과 평화와 위로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이야기들은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아직 신학교에 가기 전 나는 예수님을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에까지 전도하다가 그곳에는 교회가 없어서 아예 교회를 세우게 되었죠. 첫 성탄절을 맞았을 때 아이들은 성탄트리를 만들기 위해 집에서 엄마 몰래 이불솜을 가져오고, 오줌 지린내가 나는 담요를 가져와 무대의 막을 만들었습니다. 캐럴을 준비하고 성극을 준비해 성탄전야에 우리는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 축하행사를 열었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과 마을사람들이 돌아간 뒤 홀로 빈 예배당에 앉아 난로에 장작을 넣으며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이스라엘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갈릴리 바다에도 가보고 싶고, 예수님이 태어난 나사렛에도 가고 싶습니다.”
세월이 흘러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떠났어요. 선교사 일을 하다 한국으로 들어올 때 고마운 성도님의 배려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오게 되었어요. 갈릴리 바다에 가서 해수욕을 한 뒤 나오려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어요. 열아홉 살 젊은이가 성탄절 밤에 산골마을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 20년 전 나의 모습이었어요. 철없이 드린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20년 동안 기억하고 계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던지요. 펑펑 울었습니다(김오용 목사, 동일로교회).

1970년대 후반 독일 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에 맞은 성탄절. 이른 저녁 집회를 마치고 담임목사님 댁에서 식사 겸 친교를 하는데…. 마침 동독에서 정치범으로 낙인찍혀 서독 교회가 대가를 지불하고 사온(Freikauf) 네 분의 목사님 가정이 함께했습니다. 동독에서 아팠던 얘기, 서독에서 기쁘지만 힘든 생활, 그리고 한국 이산가족의 아픔…, 그런 이야기들이 오갔죠. 벽난로 옆에서 익은 사과를 파먹고, 교회 집사님이 농사한 포도로 빚은 붉은 포도즙을 데워 마시며, 창밖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는데, 우리는 주님이 이 땅에 구원자요 평화의 왕으로 오심을 찬양하며 함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습니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평화마스!(박종화 이사장, 국민문화재단)

집에 목욕탕이 없던 그 시절, 명절이나 공휴일에 가족들이 함께 대중목욕탕을 갔죠. 아버지는 세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을 가시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셨다는 걸 다 커서 깨달았죠. 1971년 12월 25일, 그날도 여느 때처럼 목욕을 마치고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마시며 전주 번화가를 지나는 순간, 전파사 진열장에 놓인 TV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웅성거렸어요. 서울의 대연각호텔에서 불이 나서 투숙객들이 창문 밖으로 애타게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어요. 화염을 피하려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이 생중계로 전해졌죠. 사망자만 163명에다 다친 사람이 63명. 안전불감증이 빚은 이 대참사로 크리스마스의 축제분위기는 순식간에 추모분위기로 돌변했어요. 초등학생 때의 그 안타까운 마음이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 이후로도 뉴스를 전하는 기자로 살면서 대구지하철 참사,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침몰까지…, 수많은 안전불감증 사고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는 걸 봅니다. 성탄절은 어쩌면 인간에게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구원과 참회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여전히 죄를 반복하는 우리들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합니다(민경중 사무총장, 한국방송심의위원회).

크리스마스이브 행사라고 교회 다니지 않던 동네 꼬맹이들까지 예배당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배당의 모든 불이 꺼지면서 일순간 고요해졌고, 무대 위에서 날개 달린 천사 복장을 한 아이들이 촛불을 하나씩 켜기 시작했습니다. 무대 아래에 있던 아이들이 웅성거리더니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촛불잔치를 벌려보자. 촛불잔~치야!”
그때 유행하던 ‘촛불잔치’라는 제목의 유행가였습니다.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철모르는 시골 꼬맹이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그 유행가, 즉 ‘촛불잔치’는 어쩌면 이 땅 낮은 곳에 오셔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을 켜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드니 빙그레 웃음이 돕니다(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렘브란트의 하나님> 저자).


그러나 어쩌면 우리 아이들에게선 더 이상 아무런 감동도 기쁨도 없는 크리스마스로 남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아파온다. 30대들만 하더라도 크리스마스는 그저 공휴일 가운데 하루 정도에 불과한 날이 되어버린 듯했다. 실제로 내가 던진 문자에 답을 준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고, 이런 문자만 날아올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추억? 생각나는 게 없어요. 수십 년 동안 그날 나는 뭘 했을까요?”
당장 이런저런 산적한 문제들로 우리 교회들은 힘겨워한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교회는 그런 세상과 담을 쌓는다. 암울하고 답이 없는 듯한 시각,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축제여야 한다. 이 축제가 다시 설렘과 눈물과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진다면, 다시 우리 아이들에게도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생겨나 그들의 인생길에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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