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우리들의 '크리스마스'를 찾아서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 씰을 탄생시킨 이가 셔우드 홀 선교사였다면, 일제에 의해 발행되지 못했던 크리스마스 씰을 다시 발행하도록 한 이가 바로 고 문창모 박사(1907∼2002. 의료인·독립운동가·교육가·개신교 평신도 지도자)이다. 그는 8·15 해방 후, 다시금 크리스마스 씰 모금 운동이 전개되도록 노력하였다. 평생 남김없이 모두에게 주고 간 진정한 ‘크리스마스 정신’을 살아온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말씀대로 살고자 했던 하나님의 사람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렸던 문창모 박사는 “일평생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10대 초반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16세 때 학우들과 동해안 전도여행, 배제고보 5학년 때 기독학생회장, 31세에 장로가 되고, 96세에 소천했다.
평생 수많은 직책을 맡았는데, 해방 직후에 해주시장, 4곳 이상의 대형병원 병원장, 대학교 학장, 15개 이상 단체 이사장과 회장, 국회의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또 다양한 분야의 활동에 대하여 국민훈장모란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건국포장(독립유공자) 등을 수상했다.
그의 삶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기회만 나면 전도를 했고, 힘에 부칠 정도로 많은 사람을 돕고,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었으며, 오직 예수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도 다정한 관계를 갖고 폭넓은 대인관계를 가지며 빛과 향기를 드러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가 살아온 모습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감리교 성자로 불리던 고 박용익 목사는 “문창모 장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뜨거운 분’이다. 신앙생활, 전도, 환자 돌봄, 남 돕는 일, 인간관계의 신의, 모두가 뜨겁다”고 했다.
“하나님이 날 의사 시키셨다”
그는 배제고보 재학 중 기독학생회장을 하다가 1926년 6·10 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 수감된 일로 떨어질 걸 예상하고 지원한 세브란스의전에 합격한 일에 대해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사면허증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면서 환자와의 시간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 했고, 성의를 다해 환자를 돌보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또한 낮에 시간 내기 힘든 환자들을 위해 새벽부터 병원 문을 열었다.
환자를 최우선시 하는 그의 신념은 의정활동에 참여했던 기간에도 변함이 없었다. 국회의원을 할 때(국민당 전국구 1번) 새벽에 환자를 진료하고 국회에 갔다가 환자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원주 병원에 와서 다시 환자를 돌보고 저녁에 서울 국회에 간 일이 부지기수였다. 당시 그는 80대 중반이었는데, 하루 서울을 두 차례나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정정하였다.
“어떻게 하면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도와주느냐 하는 일념뿐이며 지역사회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괴로워도 늘 기쁨과 만족으로 사니까 늙지 않는 것 같다”며 소천하기 1년 전인 95세까지 원주에서 ‘문이비인후과’를 개원하여 환자를 돌봤다. 원주뿐 아니라 외지에서, 또는 멀리서 “잘 낫는다”며 찾아오는 환자도 있었으나, ‘손이 떨려서 더 이상 환자를 보아서는 안 되겠다’며 병원 문을 닫고 70년간의 인술을 접었다.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그는 96세이던,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도 기드온협회에서 하는 성경배포활동에 참석해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직접 나누어 주었다. 11개월 전 손이 떨려서 의사를 더 이상 못하겠다고 병원 문을 닫았지만, 떨리는 손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하였다. 같이 성경을 나누던 황창성 장로(원주제일감리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나이까지 할 수 있는 건 성경 나눠주는 일이야.”
황 장로는 “나이가 들어서 다른 활동을 못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케 한 분”이라 말했다.
또한 그는 시간관리에 철저해 “제 시간에 온 사람이 늦게 온 사람을 기다리면 일찍 온 사람이 손해 본다”면서,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할 일이 많다’면서 식사시간조차도 아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라면 시간을 쪼개어서 꼭 했다. 이것이 문 장로님을 만든 비결이 아닐까 싶다.
“일제 강점기에 그리스도인의 말은 보증수표와 같았습니다.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그대로 지켰습니다. 또 물건을 팔러 다니는 보부상이 오면 식사 때는 식사를 대접하고 물건 값을 후하게 쳐주어서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했습니다. 아마 그런 소문이 곳곳에 퍼졌을 것이고 오늘 기독교의 부흥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핵퇴치운동의 출발과 정착
우리나라 결핵퇴치운동은 이 분을 떠나서는 얘기할 수 없다. 1932년에 홀 선교사가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할 때 젊은 의사로서 7인의 발행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1947년에는 국립마산결핵요양소장, 1949년부터는 세브란스병원장으로 재직하며 1949년에는 크리스마스 씰 재발행, 1953년에는 대한결핵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이로써 결핵퇴치의 초석을 다졌다.
아름다운동행 측에서 문 장로님에 대한 기사를 실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 분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할 때 위원 중 한 분이었다’고 하니, “마침 셔우드 홀 선교사가 만든 씰에 대한 기사를 준비 중이었는데 놀랐다”고 했다. 정말 이럴 수도 있구나. 90년 전에 같이 일했던 의사 두 분의 스토리를 편집자의 사전 의도 없이 함께 싣게 된 것은 ‘우연’이라는 말로 지나칠 수 없는 특별함이 아닐까!

남긴 재산 하나 없이
그는 검소한 삶을 살면서 남을 돕는 데는 언제나 아낌이 없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있어서 일일달력이나 식당 냅킨을 그냥 버리지 않고 화장실 용지로 사용하였고, 한겨울에도 기름을 절약하기 위해 온도를 높이지 않아 방이 차가웠다. 평생 해수욕도 한 번 가보지 못했다.
돈을 모으기 위해 버는 것이 아니라 잘 쓰기 위해 버는 듯했다. 이웃의 어려움을 돕는 일에는 먼저 나서고, 어느 교회가 건축을 하는 줄 알면 모르는 교회라도 일부러 찾아가서 헌금을 한 교회가 수없이 있었다. 도와줘야 할 데가 있는데 수중에 돈이 없으면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아주고 적금으로 갚아나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돌아가시기 전 지인 몇 사람이 생활비를 모아드렸는데, 그것마저 다 나누고 가셨다. 평생 의사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필요한 곳에 모두 나누어 주고 돌아가실 때는 하나도 남긴 게 없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바, 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 해야 할 일은 속전으로 진행하는 추진력, 투절한 신앙심, 근검절약, 겸손함, 장로로서의 자긍심, 그것은 이 시대의 거인이자 행동으로 신앙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다.

김정삼
법조인으로서 이웃의 아픔에 눈을 두는 그리스도인.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바름과 옳음을 생각하며, 윤리 환경 봉사 관련 NGO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원주제일감리교회 장로.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