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의 러시아 월드컵. 격렬했던 경기가 끝난 후 아이슬란드 팀의 선수들과 관중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웅장한 구호와 함께 ‘천둥 박수’를 쳤다.
이들에게 승패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한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고 격려하는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아이슬란드 하면 눈꽃 위의 오로라가 떠오르겠지만 나는 축구장 천둥 박수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천둥 박수는 춥고 척박한 자연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아이슬란드인의 기개, 또는 바이킹 혈통의 용맹스러움을 상징하는 듯했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게 뭐 그리 대단한가 싶을 수도 있지만 아이슬란드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러한 성과는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 아이슬란드 전체 인구는 내가 사는 김포시와 비슷한 35만 명, 여기에 전업 축구선수는 전부 120명에 불과하다. 실제로 대회에 참가한 아이슬란드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은 치과의사이기도 했다. 선수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골키퍼는 영화감독이기도 했고, 수비수는 소금공장 노동자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선수는 정치인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축구만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아이슬란드 축구 선수들은 어떻게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잘 해내는 것일까? 틀림없이 아이슬란드만의 특별한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아이슬란드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책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를 읽었다. 그림 속 아이슬란드는 눈으로 얼어붙은 차가운 빙하 지대와 뜨거운 연무가 피어오르는 화산 지대가 공존했다. 장엄한 쓸쓸함이 물씬 느껴지는 풍경을 그리며 저자는 ‘아무 것도 없어서 더욱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하였다.

또 다른 책, 여행 기자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후 썼다는 <아이슬란드 컬처 클럽>도 읽었다. 저자는 뉴욕, 런던, 도쿄, 베를린도 아니고 외딴 아이슬란드에서 극도로 유행에 민감한 문화 씬(scene)을 소개하였다.
일 년 중 반은 밤에도 해가 지지 않아서 밝고, 반은 낮에도 해가 뜨지 않아서 깜깜한 아이슬란드. 똑같은 게 계속해서 이어지면 지루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가 나왔다 사라지고 눈이 왔다가 비가 오는 날씨는 변화무쌍하지만 이마저도 계속해서 똑같이 반복되면 무자비하게 지루하다.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저마다의 방법이 필요했으리라.
아이슬란드의 풍경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 부담 없이 시작하면 되었다. 그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이슬란드의 시간은 길고 길었다. 아이슬란드의 시간은 느리고 느렸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그 시간이 기꺼이 즐거웠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위로했다. 그러니 “저는 축구선수인데요, 음악도 합니다”, “정치가로 유명하지만 직업이 하나 더 있습니다. 뮤지션이죠”, “청소부인데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어요”, 뭐 이런 식의 대답이 아이슬란드에서는 특별하지 않았다. 국민 10명 중 1명이 작가일 정도로 책을 많이 읽고, 10명 중 6명 이상이 뮤지션일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다. 이쯤 되면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취미가 ‘직업 모으기’라는 것도 허튼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남부럽지 않은 대한민국에 살면서도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부럽다고 느껴진 나는 책을 읽다 말고 뜬금없이 아이에게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차범근처럼 허벅지가 굵지도 않고, 박지성처럼 줄기차게 달리지도 못하고, 손흥민처럼 개인기가 좋은 것도 아니지만 우리 집 아이의 장래희망은 여전히 ‘축구 선수’였다.
대답을 들은 나는 아이가 요즘 좋아하는 것들을 더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 축구 선수, 좋지! 그런데 아빠는 말이지, 네가 축구 선수 중에서도 ‘피아노 잘 치는 축구 선수’, ‘만화 잘 그리는 축구 선수’, ‘발레 하는 축구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니?”
아이는 ‘아빠가 참 욕심도 많구나’ 하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는 나의 마음은 방금 아이슬란드 여행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뿌듯해졌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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