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록이 가져다주는 선물

지난여름, 인사동에 위치한 한 미술관에서는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주제는 ‘삼인삼락(三人三樂)’, 세 명의 작가가 세 가지 예술 분야의 전시회를 한 것인데, 어떤 점이 특별했을까.
우리나라 소아 의학계의 대부인 홍창의 서울의대 명예교수의 96세 생일을 기념해 그의 서예작품 17점과 아들인 홍영진 전 인하대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67)의 사진 29점, 며느리 김명화 작가(67)의 민화 24점이 전시된 것.
그러나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어 가족전시회를 연 것이 아니다. 전시회를 갖게 된 이유에는 가슴 찡한 사연이 있었다.

너도 그러냐
“어머님이 암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님께서 집중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싶어 서예를 권해드렸지요. 서서 해야 하는 작업인데도 참 열심히 하시더군요.”
며느리 김명화 작가는 전시회를 마련한 이유를 가슴 찡하게 적어 내렸다.

‘4년 전 어머님을 하늘로 보내드리기 전
우리 집으로 오신 아버님.
평생을 오로지 의학자로 교육자로
그리고 신앙인으로의 길만 걸어오신 아버님,
삼년동안 어머님의 투병생활을 지키신 아버님은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셨다.
소일거리로 서예를 시작하시게 되었다.
서예는 소학교 들어가시기 전 할아버지께 배운 천자문이 전부라셨다.
어려서 몸으로 익혔던 서체는 지금의 서체에도 남아있다 하신다. 붓을 잡으시면 한 시간을 꼬박 서서 쓰실 때도 있다.
어느 날 서예를 하시고 나오신 뒤 나에게 하시는 말씀.
“너도 그러냐?”
“네 아버님~”
서예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무념무상의 시간에 빠져들었음을 공감한 선문답이었다.’

“친정어머니 편찮으셨을 때 몸과 마음이 지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민화 그리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아버님께 권유해드렸지요.”
‘꽃잎 하나 색칠하면 꽃이 피어나고, 이파리에 색을 올리면 이파리 하나 피어나고… 하나님은 아마 농부가 아니라 화가이셨을 것 같다. 민화에 빠져 틈틈이 그려온 지 14년이 되어간다.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었고 그 공간은 나만의 방이었다.’

아버지 담기 위해 배운 사진
아들 홍영진 교수도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교수직을 1년 일찍 은퇴하였다.
“어머니 아프실 때 ‘아, 기록을 남겨야 겠구나’ 생각을 해서 사진을 배우기 시작해 1년 정도 배웠어요. 아버지가 제 사진의 주제인데, 증손주를 포함한 가족들 속에서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렌즈에 담으니 주제가 있어 그런지 사람들에게 울림이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사진 찍히시는 것을 좋아하셔요.”
‘재주가 없는 사람도 사진은 배우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진 촬영을 하면서 인문학적인 깊이, 예술적인 감수성, 기술적인 훈련이 모자란 것에 대한 한계를 절감한다.
아버님의 건강하고 즐거운 순간을 담고 싶었다. 부족한 사진이지만 사진을 보고 좋아하시는 아버님 모습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열심히 여행도 모시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드리는데 아버지는 말씀하시지요. 항상 어디를 가시든 ‘여기 내가 마지막 오는 거다’라고요. 그래서 사실 이번 전시회는 제자들, 지인들 모시고 사랑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한 번 만나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살아온 길, 십자가의 길
소아심장학의 대가로서 선천성심장병의 진단법을 국내에 처음 도입해 심실중격결손증 등 국내 어린이에게 가장 흔한 기형질환인 선천성심장병의 정확한 진단이 홍창의 명예교수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고, 서울대병원장과 서울대보건대학원장을 역임하며 당시에는 생소했던 가정의학과를 창설하고, 미국 등 선진국처럼 서울대병원에 어린이를 전문진료하는 소아병원을 개원하고, 한글판 소아과교과서를 내기도 했다.
또한 인도주의실천운동의사협의회 산파 역할을 했으며, 황해도 해주 출신의 실향민이기도 한 홍 교수는 평양어린이병원을 세우는 것과 북한 어린이에게 의약품 보내는 운동 등을 전개했고, 1953년 민중신학자 고 안병무 교수와 함께 향린교회를 시작한 창립멤버로 한국기독의사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홍창의 명예교수의 삶을 자녀들은 뭐라고 부를까.
“‘순명(順命)하며 살아온 삶’이셨어요. 따지고 갈등하지 않고 힘들든, 불리하든 유불리 따지지 않고 살아오셨습니다. 평생 정말 노는 것 모르시고 살아오셨어요. 언제나 교회와 병원 사역 하시느라 쉰다는 개념 없이 사시다가 어머님 돌아가신 후 이제야 쉬시는 거예요.”
아버지처럼 소아과 의사로, 향린교회 장로로 살고 있는 홍영진 교수는 “아버님은 교수로서, 학자로서, 신앙으로서 먼저 걸으셨던 분이지요. 여러 분야에서 후진들에게 큰 나무, 큰 기둥이 되어주셨습니다. 참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더 성서적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셨고, 고통 받는 약자들과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를 고민하셨고, 그것은 제 고민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한다.
홍창의 명예교수가 저술한 기록에는 아들이 물려받은 그 질문들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데 의사의 존재 목적이 있다면 지금처럼 죽음의 세력, 야만의 세력이 팽배한 시대는 의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 국가와 국가 사이의 평화, 사람과 모든 생물 사이의 평화는 슈바이처가 말하는 모든 생에 대한 외경심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저 안이하게 환자를 보며, 여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편안히 가족들과 같이 사는 데 만족하는 의사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눈을 감으면서, 나의 일생은 허망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을 수 있는 그런 의사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어디까지나 그의 수난에 참여하는 자에게 현실로 되는 것이지 구경꾼들에게까지 인식될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그것은 죽음 없이 새로운 삶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의 발로 직접 걸어야만 하는 길이다. 그저 머릿속에서 그려본다거나 멀리서 바라보면서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외골수의 길이요 외로운 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부축해가며 걸어가라고 예수님이 남기고 가신 길이다.’

“순례의 길을 가고 싶어요. 나한테 주어진 길, 나한테 주어진 소명 끝까지 잘 감당하고 마무리하길 바래요”, “낭비 없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에 들은 홍영진 교수 부부의 바램은 홍창의 명예교수가 이미 살아온 삶과 닮아 있었다.
아, 그렇구나. 올곧은 삶의 기록은 세대전수 되고, 약한 이들을 보살펴왔던 그 살뜰하고 상냥하고 치열했던 모습은 자녀들을 통해 다시 복기되는 것이구나. 가족의 한 따뜻한 전시회를 통해 ‘기록되는, 기록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아름다운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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