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기록이 가져다주는 선물

자기의 지난날들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 속에서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중요한 삶의 흔적들을 남기기도 하고, 소소한 일상을 귀하게 여기며 오프라인에, 온라인에, 자기만의 기록으로, 때로는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긴다. 여기 그렇게 기록을 남기고, 또한 재구성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 그렇게 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기록은 인류 역사를 이루는 근간이자, 한 사회를 평가하는 수단으로서 그 힘은 막강하다. 기록의 단위가 보통 사람의 구체적 삶으로 작아졌을 때에도 여전히 그 힘이 셀까? 인류가 긴 시간 남성 지식인을 중심으로 기록을 남겨왔다면, 소셜 네트워크 시대인 지금은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만의 매체에 기록을 남기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어도 자신만의 관점으로 기록자가 될 수 있다. 그 기록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며 소수자의 목소리에 민감성을 가지도록 돕는 힘을 발휘한다. 비록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지배의 자리에 있지 않아도, 많이 배운 지식인이 아니어도 기록자가 될 수 있는 길. 그 길의 자취는 어떤 것일까.

#1. 이옥남 할머니_누구나 기록할 수 있다
1922년생, 올해 아흔 일곱 살 되신 이옥남 할머니는 “글씨 좀 이쁘게 써 볼까 하고 날마다 일하고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셨다. “복숭아꽃 피면 호박씨 심고, 꿩이 새끼 칠 때 콩 심고, 뻐꾸기 울기 전에 깨씨 뿌리고, 깨꽃 떨어질 때 버섯 따며 자연 속에서 일하며” 사는 할머니. 그 평범한 할머니가 손으로 기록한 일기가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일하고 때로 자식 일로 걱정하며 기록한 이 일기는 누구나 기록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해당화, 개구리, 달래, 찔레, 감자, 까마귀 같은 자연을 벗 삼아 일하는 할머니가 “앞마당 끝에 해당화 꽃나무는 봄을 재촉하는 이때…사람은 춥다지만 풀과 꽃은 때를 놓칠까 바쁘게 서둔다”며 기록한 99년 봄의 일기에는 자연의 섭리가 담겨 있는가 하면, “육십칠 년 동안 무엇 하나 쌓아온 것 없고 남은 것은 얼굴 주름살과 슬픔밖에 없다. 거기다가 큰딸 하나 의지하고 그럭저럭 지냈더니 사위도 왠지 건강치 못하고 몸에 병까지 드니 가슴이 쓰리다”는 88년 일기에는 인간 보편의 감정이 담담하게 적혀 있다.
아흔 일곱 번째 봄을 살고 있는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인 평범한 이가 삼십 년간 써내려 간 정갈한 기록은 우리에게 다정한 위로와 생에 관한 한 조각 통찰을 건넨다. 기록하는 이의 특별할 것 없음에서, 동화 속 주인공처럼 늘 행복하지는 않은 삶에서 우러난 힘으로 말이다.

#2. 무명의 트위터리안_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다
누구나 기록할 수 있다면 또한 우리는 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다. 무명의 트위터리안이 적어 내려간 ‘임신일기’는 그 좋은 예다. 사람들이 환영하고 공감할 만한 것들만 가려내 기록하는 공간이 SNS의 한 면이라면, ‘임신일기’는 임신출산 과정을 날 것 그대로 적어 내려가 SNS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2018년 1월 23일 “임신출산의 과정들을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배제하고 고립시켜 <맘그룹> 안에 가두려는 시도를 규탄한다. 더불어 자발적/비자발적 비임신여성의 소외가 없길 바란다. 아주 놀랍게도 여성에게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라는 메인 트윗을 내걸고 아홉 달간 적어 내려간 임신일기는 당사자의 목소리로 임산부가 한국사회에서 겪는 온갖 상황과 내면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다. 임신이란 그저 축복이고 아름다운 것처럼 그려내는 미디어의 환상 너머에 임산부 당사자가 들려주는 속이야기는 그 결이 다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임신여성/비임신여성 모두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냈다. 내 삶을 구성하는 무엇이든 기록의 주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어떤 주제에서만큼은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을 기록하느냐 그냥 넘겨버리느냐에 따라 내가 내 문제의 당사자가 될지 그저 누군가가 그려내는 내 문제를 지켜보기만 하는 방관자가 될지가 결판날 것.

#3. 왜 기록하는가
누구나, 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왜 기록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떠오른다. 이옥남 할머니는 글씨 좀 이쁘게 써보려고 일기를 기록해 독자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한 무명의 임산부는 임신출산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내 납작해진 여성의 삶에 다채로움을 입혔다. 나만의 이야기가 활자화되었을 때 드러나는 어떤 힘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그 기록이 위로가 될지, 사회변혁의 불씨가 될지. 그러므로 오늘밤부터 기록을 남겨보자. 내 기록이 어떤 힘을 지니게 될지 알고 싶다면.

박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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