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조건 가운데 하나는 ‘불천노(不遷怒)’입니다. 곧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 사람’이 어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화가 나면 그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쏟아버려야 ‘마음의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참 위험한 생각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분노’를 ‘뒤모스(θυμός)’라고 표기했는데, 이 어휘는 ‘희생 제물을 드리기 위해 가차 없이 짐승을 살해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분노의 성격에 설명하는 어휘 가운데 이보다 탁월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사실 분노는 ‘불’과 같아 쏟을수록 더 거세져 결국 자신까지 태워버리는 화마(火魔)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보면, 지옥의 지배자 루시퍼의 얼굴이 진홍색, 검은 색, 노란색을 띤 ‘세 얼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단테는 그 ‘세 색깔’이 루시퍼가 즐기는 기질인 각각 ‘증오’, ‘무지’, ‘이간질’이기 때문에 그런 얼굴색을 갖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단테의 문학적 통찰이 빛나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얼굴은 물론 ‘물건’도 주인 얼굴을 닮습니다. 따라서 분노에 젖어 사는 사람의 얼굴은 그 분노를 닮습니다.
이제 ‘흰 새치 뽑듯’ 분노를 제거하기 위한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첫째, ‘말’ 아끼기.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는 ‘물고기’를 가장 신성한 존재로 섬겼습니다. 그 까닭은 살아있는 것 중 오직 ‘물고기’만 침묵을 할 줄 아는 존재라는 이유였습니다. 새들은 노래하고 가축도 울음소리로 말합니다. 그러나 ‘물고기’는 ‘소리’가 없습니다. 이는 ‘말을 줄이는 것’이 분쟁과 갈등을 줄이는 길임을 가르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분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노가 솟아오를 때는 무엇보다 ‘말’을 아껴야 합니다. 분노의 감정에서 쏟아내는 말은 불쏘시개와 같습니다. 상황을 지금보다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따라서 ‘분노’라는 격한 감정이 치솟을 때는 ‘말의 감축’을 선택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하루’만 담아 두기.
분노를 아직 ‘자기 안’에 담아둘 때까지는 ‘반딧불’에 불과한 화력(火力)을 지닙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자기 밖’으로 표출되는 순간 주위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인페리노(꺼지지 않는 불)’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분노가 처음 솟아오를 때 주의해야 합니다. 사상가 랠프 에머슨은 “지금 악한 일을 하고 싶을 때 그 일을 ‘하루만’ 뒤로 미뤄보라. 그러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루’ 정도면 분노를 엷게 ‘희석’시키는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하루’는 분노를 진압하는 소화기(消火器)입니다. 따라서 분노를 ‘하루만’ 속에 담아 숙성시키면 ‘이런 일로 내가 이렇게까지 분노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깊은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분노사회를 사는 이 시대는 다시금 “분노라는 녀석은 못 본체 가만히 놔두면 스스로 작아져서 없어진다”라는 현명한 언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가을에 드릴 첫 번째 기도가 “분노가 삭제된 어질고 자상한 영혼을 지니게 하소서”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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