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수업>, 페터 볼레벤 지음, 장혜경 옮김, 이마, 2016년, 308쪽

‘보름산의 살아 있는 것들’을 주제로 움직이는 조각, 모빌 만들기를 진행했다. 숲 선생님은 맨 위는 하늘에서 사는 생명, 중간은 땅에서 사는 생명, 그리고 제일 아래는 땅 속에서 사는 생명으로 그림을 그려 3단 모빌을 만들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도 식물을 그리지 않고 있었다. 식물은 이동력이 없어서일까, 좀처럼 생명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라고 다를 바 없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나뭇잎 색깔을 보며 막연하게 숲이 살아있다고 느낄 뿐 풀과 나무에 대해서 아는 게 얼마나 될까? 나에게도
<나무수업>이 필요했다.
숲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너무 평범한 것들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본다면 믿기 힘들 정도로 비범하다. 다만 식물의 모든 감각은 동물과 전혀 다른 배열이기 때문에 지금 나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라도 하려면 유연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풀과 나무는 자신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생각이 말로 하는 것이라면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식물들이 과묵해서 통 말이 없는 것 같지만 나무님들은 모두 말을 한다고 농을 친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 소리는 수동적인 결과물일 뿐 나무가 내는 소리는 아니다. 나무는 ‘향기’로 말을 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기린은 우산 아카시아를 먹는데, 아카시아 입장에서 보면 기린 같은 대식가는 그야말로 불청객이다. 그래서 아카시아는 기린을 쫓으려고 기린이 자신에게 입을 대면 몇 분 안에 유독 물질을 내보낸다. 그럼 기린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다른 나무에게로 뚜벅뚜벅 옮겨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바로 옆에 있는 나무를 먹지 않고 굳이 100미터나 뚝 떨어진 곳까지 걸어간 다음 다시 식사를 시작한다. 잎을 뜯어 먹힌 아카시아가 경고의 향기를 방출하여 주변 동료 아카시아에게 알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고스럽지만 좀 떨어진 곳까지 가서 아직 경고를 받지 못한 나무의 잎을 뜯어 먹는 것이다. 아카시아처럼 여타 나무들 또한 공격을 받으면 피톤치드 같은 항균 물질을 내뿜고 동족 나무들에게 위험을 알린다고 하니 나무는 필시 동물이 그런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게 틀림없다.

평온한 것 같지만 숲과 들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나무들과 풀들이 하루하루 치열하게 다툰다. 내가 작은 땅 텃밭 농사를 짓거나 정원을 가꿀 때마다 벌레나 해충뿐만 아니라 격렬하게 엉켜 싸우는 들풀들 때문에 매년 애를 먹었는데, 같은 종끼리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는 식물들의 능력을 알았다면 종이 다른 식물은 근처에서 사실상 제거해 주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식물들에게 수다의 즐거움을 되돌려 준다면 숲뿐만 아니라 우리의 들판과 식탁도 훨씬 풍요롭고 행복해질 거라는 저자의 기대감은 농사 기술 분야에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말하고 생각하는 나무의 존재를 재확인하면서 나무도 아픔을 느끼고, 지난 일을 기억할 수 있으며, 나무의 부모도 자기 자식들을 돌보며 함께 산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자식을 부모에게서 베어 버리거나 둘 사이를 기계로 마구 헤집지 못할 것 같다. <나무수업>을 읽으며 스위스가 아름다운 이유는 비단 알프스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스위스인들에게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길가의 꽃이라도 함부로 꺾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고 있는데 스위스 연방 헌법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고 한다.
“동물, 식물, 다른 유기체를 대할 때는 생명의 존엄성을 유념해야 한다.”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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