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소통한다는 것

요즘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가 ‘소통’입니다. 사람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관계적 능력이죠. 어느 시절인들 소통이 중요치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라면, 이는 역설적으로 소통이 안 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진정한 소통은 ‘나’의 의미만이 관철된 것도, ‘너’의 의미만이 관철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은 부모 자녀 간의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해요.

소통이 잘 된다고?
“우리 집은 소통이 잘 된답니다~” 보통 어머니나 아버지가 이렇게 이야기하신다면 어떤 상황인 걸까요?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따르는 경우일 겁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구나.” 이 말은 자녀가 결국 부모의 답에 승복했다는 의미겠지요. 그렇지만 ‘소통’은 너와 나 사이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로서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아가는 일이죠.
물론 강자의 의견대로, 부모의 의견대로, 갑의 의견대로 따라도 공동체는 ‘평화로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통이 아닙니다. 일방향의 명령과 복종이 있을 따름입니다. 군주제가 종식된 이후 이제 왕이나 귀족들의 일방적인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본’을 기준으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에 명령과 복종 관계는 존재합니다. 권력이 불균등한 상태인 경우 ‘소통’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한쪽의 답이 관철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죠.
“에이, 요즘처럼 아이가 귀한 세상에, 더구나 집안마다 아이가 거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시절인데, 오히려 ‘소통’은 일방향으로 아이의 답을 들어주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맞습니다. 여성 한 명 당 출산율이 0.9명인 소위 ‘0.9 쇼크’까지 직면한 우리 사회에서 이젠 한 집안에 둘도 드문 자녀는 그야말로 ‘보물단지’이지요. 무엇이 갖고 싶은지, 무엇을 하며 놀고 싶은지, 자녀가 미처 요구하기도 전에 부모는 전전긍긍 아이의 안색을 살피며 필요를 앞서 채웁니다. 내 아이는 꽃길만 걸었으면 하는 마음이죠. 이런 부모의 마음을 미국에서는 ‘잔디깎기맘’이라고 표현합니다. 아이가 걸어가는 앞에 미리 긴 수풀 등의 험한 장애물은 다 밀어버리고, 뽀송뽀송 걷기 좋고 평평한 잔디밭을 만들겠다는 열정입니다.
부모의 답 위에서 걷는 아이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자녀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지대하게 높아졌지만, 실은 이러한 자녀 사랑의 이면에는 여전히 ‘부모의 답’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부모는 아이의 학습과 미래의 직업까지도 미리 결정해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우리 집안에 의사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이런 막연한 소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후기근대(late-modern) 사회의 부모들, 특히 엄마들을 일컬어 ‘전문엄마’라고 부르는데요. 전문성을 가지고 자녀 양육에 임하는 엄마(부모)를 의미합니다. 선행학습 목록과 진도를 다 꿰고 있는 상태에서 자녀의 인생을 ‘기획’하는 엄마이죠. 만약 내 자녀를 ‘의사’로 만들고 싶다면, 막연히 압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이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합니다. 심지어 임산부 미적분반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아이가 수학을 못해서는 이런 기획에 차질이 생기니, 태교로 미분과 적분을 푼다는 겁니다. 만약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이런 엄마의 기획을 자녀가 잘 따라준다면 엄마(부모)는 만족감을 가지고 말하겠죠.
“아휴, 우리 아이랑은 소통이 아주 잘 된답니다.”

자녀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소통은 나의 의미가 너에게 관철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너의 의미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죠. 관계 안에서 서로의 의미가 만나고 전달되고 때론 부딪히고, 그 과정 중에서 서로가 함께 수긍할 답을 찾아가는 것이 소통이죠. 그런데 전문엄마에게는 그런 과정이 생략되어 있어요. 내 답이 너무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전문엄마의 답으로 자녀 양육에 임하는 것이 결코 자녀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일단 자녀는 개체생명이거든요. 자신의 의미와 답을 가져야 잘 자라는 건데, 엄마의 답을 그저 수동적으로 내면화한다면 어찌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겠어요? 요즘 대학 강단에서 자주 만나는 ‘엄친아’들 중에는 매우 순종적이고 똑똑하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게 매우 걱정됩니다. 앞으로 올 세상은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과 너무 다를 것이기 때문이죠. 제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만, 이제 직면할 세상은 지금까지의 제도나 삶의 방식과는 혁명적으로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예요. ‘전문엄마’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근현대 관료제(Bureaucracy)를 먼저 산 경험이 있어서 가능했지만, 이제 아이들이 살 세상은 우리가 경험한 세상이 아닐 거거든요. 우리가 상상도 못해본 위험과 도전이 앞에 놓일 텐데, 그걸 헤쳐 나갈 힘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이는 코딩 교육을 선행하는 것도, 인공지능이나 유전공학과 같은 ‘유망한’ 전공과목으로 교육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아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하면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행복해할 수 있는 ‘재능(merit)’을 길러주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엄마(부모)의 답이나 인도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가 제 안에서 찾아나가는 것이죠.

‘4기’를 하자!
그래서 저는 늘 ‘기획하려는 마음을 포기하고 4기를 하자’고 초청합니다. 4기란, 기억하고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이에요. 내 자녀가 자신의 의미대로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면서 ‘기억’하고, 내 자녀만의 관심과 특성들이 이 땅에 어떤 새로움을 가져올지 ‘기대’하며, 그 재능이 열매 맺는 날을 ‘기다리고’, 그 과정 중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힘을 모아 ‘기도’해주는 엄마(부모)가 되자는 말이죠. 이 과정은 일방적이지 않아요. ‘4기’는 자녀가 부모를 향해 가져야 하는 마음이기도 하거든요. 우리 엄마는, 아빠는 무엇을 하면 행복해하는지,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 된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지, 전제 없이 바라봐주고 그 모습을 기억해야 하니까요.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도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소통은 참으로 ‘혁명적’입니다. 그 결과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죠.

백소영
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듯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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